- 도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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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2.6.20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 글쓴이
- 김재원 저
빅피시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를 좋아해 학사는 물론 석사, 박사까지도 따고 팟캐스트 '역사 공작단'에서 활동하며 최근 '홍진경 공부왕 찐천재'에도 출연해서 점점 유명세를 타고 있는 김재원 박사의 정말 짧지만 빠르게 한국사를 훑은 책이다. 흐름위주라 보면 된다. 아마도 수능이나 학업 중심으로만 역사를 배운 사람들에게는 가볍게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학업하는 사람들에게도 읽어두면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한 채 세부적인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빠르고 짧게 훑으려면 어쩔 수 없이 선택과 압축, 생략이 필요하다. 저자의 주관에 따라 그 과정에서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언제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긴 하다. 자료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책에서(특히 교과목 쪽) 덜 다뤄지거나 빠르게 지나친 부분들에 더 주목한 듯 하다. 하지만 대략적으로는 역사 공부의 큰 흐름과도 겹치긴 한다.
하지만 여러 역사 콘텐츠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대략적으로 빠르게 훑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동안의 책들이 덜 시도했던 부분이다.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와는 또 다른 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짧게 요약하다보니 발생하고 드러나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바로 권력욕이다. 백성의 역사보다 왕의 역사가 많다보니 그리고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다보니 결국은 상위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권력욕을 위한 수많은 흥망이 전해져 온다. 이는 현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판도 결국은 역사의 축소판에 가까운 셈이다. 왕과 신하들의 관계와 나라와 나라의 관계들은 아직도 다른 버전으로 일어나고 있으니까. 역사는 크게 보면 역시 반복되는 중이다. 그러므로 짧게라도 다시 훑어보는게 많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현대와 현재를 이해하는데.
**적당한 욕심은 괜찮지만 과한 욕심은 언제나 망을 부른다.
***심지어 항상 승자가 고인물이 되어 다시 새로운 세력에 밀려나는 것은 역사학의 클리셰다.
****권력 집단이 잘 할때는 괜찮지만 스스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순간 선을 넘게 된다. 독재나 폭군이나 암살처럼.
*****국제 정세도 비슷하다. 후대에 보니까 잘 보이는 것이겠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국제 정세를 제대로 알려고 노력했을지 조상들의 고생이 훤히 보인다.
******제대로 읽어내면 그나마 사는 것이오, 잘 못 읽어내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언제나 사실을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봐야 한다. 특히 멀리서 내려다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게 현대에는 메타적 시각이라 불리고 있다.
*********입체적으로 보는 것까지도 더해져야 한다.
**********일부러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도 있다.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만 보게 되고, 근시안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게 잘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만 상대방이고 결국 자기식대로 오독한다.
************굵직한 역사적 큰 사건들은 모두 이 해석의 차이와 시각의 차이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근대 한국사는 더더욱 그점이 많이 보인다. 가까워서 그런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잘못된 길을 가도, 제대로 된 길을 가도 역사는 나아간다. 단점만 있지도 않고, 장점만 있지도 않다. 그게 세상인가보다.
***************만약 달리 했더라면의 안타까운 순간도 여전히 많이 보인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다 그럴 수밖에 없는 흐름의 결과이다.
****************중간에서 일부러 해외사와 연관지어서 보려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역사가 그렇다. 우리 나라의 역사만 볼 게 아니라 당시 전세계의 흐름과 같이 놓고 봐야 맥락이 더 잘 보인다.
*****************지금만큼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지만 그래도 서로 영향받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나라가 세지면 누군가의 나라가 약해진다. 그 틈 바구니를 잘 파고 들어야 생존한다.
*******************언제나 가족사로 연결되는 지점도 흥미롭다. 왕들도 그랬지만 정치도 그랬다. 근대사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사가 분명히 등장할 것이다.
********************그게 다 세력 때문이다. 결코 혼자서는 해낼 수 없어서 세력이 필요하지만 세력이 뒷받침 해주면 그 꼭대기에서 단 한사람이 많은 것을 좌지우지 한다.
*********************때로는 세력이 한 사람보다 더 세서 한 사람을 통해 좌지우지 하지만 어쨌든 한 사람이 중요해진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 구도는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사를 바탕으로 지금은 어느 쪽이 고인물이고 어느 쪽이 새로운 흐름일지. 어느 쪽이 세력화 됐고, 어느 쪽이 분열화되고, 약화됐는지. 국제 정세도 마찬가지다.
************************결국 알면 알수록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미 양자역학이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듯이.
*************************과거에도 인구는 중요했다. 군대도 중요했다. 백성들도 중요했다.
**************************멸망은 단절로 이어지지 않고 흡수와 영향으로 이어졌다. 교과서에서는 소국의 경우 단절처럼 다뤄지지만.
##인상적인 문구들##
##한 무제는~추측해보면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명분으로 고조선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싸움은 장기화됐고, 고조선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났다.~이때 수많은 고조선의 유이민들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 거대한 변화를 촉진했다.
##조금 더 깊이 안다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과 백제의 시조 온조가 부여에서 왔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이 사실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꽤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만들어지던 때에도 부여는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부여는 고조선이 망하기 전에 생겨서 삼국 시대가 한창 이어지던 때까지 남아 있었다. 무려 존속 기간만 700년이었다. '삼국 시대'라는 말은 그러니까 지극히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중심적인 표현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삼국의 탄생과 통일이라는 교과서 서술에 맞는 대서사시를 위해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나라가 바로 부여인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굳이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서 찾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나 부여에서 왔어"라고 하면 적어도 무시는 안 당하던 시절이라는 말이다.
##백제, 신라, 가야는 삼한에서 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 고구려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옥저와 동예를 통합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옥저에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머릿수였다. 고대 국가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구다.
##삼한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변화한 것이다.
##중국이 전,후한 교체기에 접어들면서 한나라의 낙랑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혼란을 틈타 낙랑 지역으로 서서히 진출한다.~고구려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고구려가 전란을 수습하고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해나가는 동안 위나라와 진나라가 무너지며 동아시아 전체는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동아시아의 중심축은 다시 무너졌고 각자도생의 시간의 도래한 것이다. 고구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낙랑군(313년)과 대방군(314년)을 공격해 손에 넣는다.
##백제가 고구려에 치욕적으로 패배한 이후 한반도 정세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은 싸움을 잘해야만 전성기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라가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는 관료제도의 성숙, 이에 따른 왕권 정도, 인민을 관리하는 수취 제도의 발전, 주변국과의 관계, 문화수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대로 주저앉을 백제가 아니었다. 군사적 열세에도 고구려에 대항하여 키워갔던 외교 역량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백제-송-가야-신라-왜 외교라인이 단단해지면서 백제는 중흥을 준비한다.
##신라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한강은 우리가 접수한다.~내부적으로는 불교를 앞세워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고히 한다.~더불어 신라가 신경 썼던 활동은 바로 외교였다.
##전기 가야가 해상 교역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면, 후기 가야는 안정적인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가야인들은 신라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갔다. 그 유명한 김유신 장군도 가야 사람이었고, 심지어 가야의 왕족이었다. 가야의 역사에 몰입해보면, 가야가 망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가야 출신 명장이 신라의 거대한 전성기를 이끌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출생의 미스터리와 취약한 정치적 입지를 이겨낸 의자왕의 비결은 다름 아닌 반듯한 행실과 효심이었다. 심지어 그의 별명은 해동의 증자로, 그가 효심과 우애의 아이콘이었다는 뜻이다. ~그의 입지가 다시 흔들린 이유는 대야성 함락 이후 국외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외교 노선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변화무쌍한 국제 질서 속에서 , 주변의 적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견뎌야 했던 고구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자비한 카리스마로 권력을 움켜쥐고 내부 의견을 빠르게 단결시킨 연개소문의 정치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체계화된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정치적 독점으로 굴러가는 국정 운영 방식은 그 개인이 사라지는 순간 위기를 맞는다.
##신라는 삼한일통 의식을 만들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품었다고 홍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훌륭한 프로파간다였다. 그간의 길고 치열했던 전쟁을 하나가 되기 위한 시간으로 포장하면서, 우리는 하나라고 외쳤다.~하지만 평화의 시기가 길어지면서 사소한 차별에 대한 불만이 수면위로 급격히 올라왔다.~신라의 유이민 통합 정책은 실패했고, 백제와 고구려 유이민들은 끝내 진정한 신라인으로 재탄생하지 못했다. ~호족들이 내세운 정체성이 다름 아닌 '다시 백제로!', '다시 고구려로!'였다는 점이다.
##결국 허울뿐인 삼한 일통이라는 통일 슬로건은 "다시 고구려로!"를 앞세운 고려에 돌아갔다.
##당시 왕건이 자고 나란 지역의 신성함을 불어 넣기 위해서 당시 가장 트렌디한 사상이었던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도 삽입한다.~황해도 촌놈인 줄만 알았던 왕건이 알고 보니 신라 왕실의 방계였는데, 당나라 천자의 피도 섞였고, 신성한 서해 용왕님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근데 왕건이 나고 자란 땅이 그렇게 좋은 땅일 수가 없다는 의미다.~고려의 한반도 통치를 위해 만들어진 이 설화는 용손 관념(용의 후손만이 왕위를 오를 수 있다는 뜻으로 고려의 왕은 왕씨만 오를 수 있다는 관념)으로 굳어져 왕건의 후손이 아닌 혈통이 왕위에 오를 수 없게 만드는 기반이 된다.
##고려는 재화와 사랑으로 평화를 만들고 있었다. ~호족의 딸과 결혼하면서 말이다. 정치를 사랑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중요한 건 통합이었고 이를 위해 호족에게는 사랑과 재화를 일반 백성들에게는 신화를 통한 프로파간다와 종교적 권위(불교)를 내세웠다.
##고려가 이른바 '외왕내제(외부적으로 국왕을 칭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이중 체제)의 전략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상 호족과의 전쟁이자 왕권 강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행위였던 것이다.
##동생이 왕위를 잇는 것은 그간 고려가 선택한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한 방식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문신들이 오랜 시간 고려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충렬왕 재위 기간의 정치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측근 정치다. 물론 전근대 시기 왕 중 측근 세력을 키우지 않고 정치했던 왕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원 간섭기는 바로 이 측근 정치가 극도로 판을 친 시절이었다. 이런 시스템에는 큰 맹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 시기 빈번한 왜구의 공격은 이전 시기의 침략과 달랐다. 이 시기 왜구는 단순한 일회성 약탈을 넘어 일부 지역에 자리를 잡고 수개월을 주둔하며 고려 사회를 어지럽혔다.
##고려말~나라와 백성을 살리려는 일부 정치인도 있었다. 바로 신진사대부다. 이들 중에는 '뜯어고치는 김에 나라 이름도 바꾸고, 왕도 바꾸자!'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고, '왕까지 바꾸는 건 좀 아니지 않나?'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적어도 이들은 고려의 가장 큰 문제가 부동산(토지)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남의 땅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야 했던 백성은 대부분 점점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권세가들은 수확량의 대부분을 챙겼다.
##누군가는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라고 말했지만, 역사는 절대 그렇게 단순하게 쓰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칼부림에는 명분과 정당성이 중요하다. 수양대군이 칼부림에 덧입혔던 명분은 대체 무엇이었기에 그의 쿠데타는 반정이 될 수 없었을까?~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유독 계유년의 '정난'이라 했을까? 반정이 아니고.
##조선 시대 벌어진 사화라는 사건은 사실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사화의 원인과 상황은 달랐지만 결국 정치적 견해 차이로 벌어진 극단적 형태의 정치 탄압이었다.~사화는 폭군들만이 사용한 정치술이 아니었다. 국왕 혹은 국왕과 의견을 같이하는 관료 집단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벌이는 극단적인 정치 행위였다.
##전쟁의 구조적인 원인이야 다양하게 존재할 테지만,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전쟁을 결정하는 의사 결정권자의 욕망이다. 임진년의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다.
##광해군의 파병 거부는 명나라에 대한 패륜이었다.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고립되기에 이른다. 광해군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왕권 강화를 위한 쓸데없는 행정을 벌이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궁궐 증축에 강한 집착을 보였는데, 안 그래도 전후 복구로 정신없던 백성들에게 궁궐 중축이라는 거대한 토목 공사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올 수 있는 문제였다. ~외교에서 꼬인 스텝을 내부에서 풀려는 중에 벌어진 완벽한 헛발질이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효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척화와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산림(향촌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선비)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왕위의 정당성을 북벌이라는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한다.~그렇게 조선은 붕당의 시대를 준비해야 했다. 전쟁은 정리됐지만, 전쟁(병자호란)의 여파가 정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임진년과 병자년의 전쟁 이후 조선의 관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해야 하는 명분과 전혀 다른 현실(청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조선이 더 극단적인 성리학적 사고에 갇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숙종이 생각한 방법은 다름 아닌 '환국(정치적 국면의 전환)'이었다. 다시 말해 왕이 국정을 운영할 때 함께 손잡을 당파를 특정 국면에 따라 교체한다는 의미다.~마치 숙종의 환국처럼 영조는 양위 선언을 통해 '누가 더 나에게 애원하는지'를 확인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조선에서 왕의 결혼이란 곧 외척 세력의 입궁을 의미한다.
##새로운 조선이 선택한 정책의 핵심은 쇄국이 아닌 수교였다. 하지만 명확한 방향성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열강과의 수교는 막무가내로 이어졌고, 내정은 오히려 세도 정치 시절의 부패로 이어졌다.
##광무 개혁이라고 불리는 근대 개혁은 사실상 황실의 재산을 불리기 위환 사업이 됐고, ~정치적 리더십은 부재했고,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제로에 가까웠다. 입헌 군주제조차 받아들일 수 없던 고종은 말년에 갈수록 권력에 집착했다.
##이미 19세기 말 무렵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2만 3천명에 달했다. 무려 2만여 명이 넘는 인구가 '헬조선'을 탈출한 것이다. 러시아 다음으로는 만주와 간도로 이주했다.~ 그 다음은 하와이였다.
##제국의 잔인한 식민지 통치는 다름 아닌 투자에서 시작된다.~뭐? 일본이 조선에 투자했다고? 너 식민지 근대론화론자야?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일본은 한국의 일부 도시에 과감히 투자했고, 그곳은 곧 식민 도시로 변모하면서 모든 것을 제국 일본에 뺏겨야 했다.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목포다.
##목포에서 조선인들은 점점 살아갈 공간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기본적으로 목포 도시 개발의 핵심이었던 조계지는 원칙적으로 조선인이 들어가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땅이 없던 조선인들이 터를 잡은 곳은 결국 도시로부터 한참을 벗어난 공간이었다.~화려하게 탈바꿈한 근대 도시 목포는 철저히 유산층, 즉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지 조선인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식민지 시기 이난영이 노래한 <목포의 눈물>은 어쩌면 '조선의 눈물'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교육에 대한 집착이 형성되는 과정이야말로 식민지 시기의 차별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바로미터다.~이러한 암담한 현실에서 교육을 통한 사회적 지위 향상은 조선인이 꿈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먹고살기 힘들어도 학교는 보내야 한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36년이란 시간동안 이미 형성된 비뚤어진 교육열을 정상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은 교육, 아니 입시에 미쳐 있고 교육 정상화의 노력은 아직도 유효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게 제주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전쟁이 시작됐다. 토벌의 이유는 이념이었지만 제주 도민의 투쟁 이유는 그저 생존이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 운영의 방향성을 던지고, 그 방향성에 따라오지 않는 세력을 탄압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조직이었다. 민간 조직(각종 우익 단체와 청년 단체)뿐만 아니라 국가 조직(경찰과 군 내의 협력 세력)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승만은 근대 교육을 받고 자란 근대인이었지만, 근대화되지 못한 국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찬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이승만은 임시 정부의 'President'라는 직책을 스스로 '대통령'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기까지 했다. 크게 통치하며 거느린다니, 얼마나 권력 지향적 표현이란 말인가.
##4월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의 정권은 민주당이 잡는다. 하지만 민주당 정부는 4월 혁명으로 분출된 시민들의 요구를 모두 떠안지 못했다. 심지어 부정 선거 관련자조차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고, '집회와 시위 운동에 관한 법률안', '반공을 위한 특별법'등을 구상하며 시민들의 요구에 역행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시민들은 다시 동요했고 정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바로 이 혼란을 안보 위기로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 세력이었다.
##군인들은 부정 축재자를 처벌하고 농어촌 부채를 탕감해주면서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다.~박정희와 공화당은 마치 이승만이 그랬던 것처럼 종신 집권을 꿈꾼다.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태롭습니다. 여러분! 저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말이다.
##유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사회 통제가 필요했다. 이미 이를 위한 사전 준비로 1968년 향토예비군이 결성됐고, 주민등록증 개정안이 통과됐으며, <국민 교육 헌장>이 선포돼 사상 교육이 진행됐다.~박정희는 국가를 위해서 국민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노골적으로 강남 개발을 촉진하려 했다. ~강남 개발의 화룡정점은 명문고 이전이었다.1976년 종로의 경기고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 갔고, 뒤이어 1978년의 휘문고가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겨 가자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8학군이 탄생한 것이다.
##삼풍 백화점이 들어선 1980년대 후반, 이미 강남과 강북의 계층 분화 현상은 뚜렷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부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강남 아파트'가 꼽히게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IMF가 터지던 1997년은 한국 자본주의 역사의 황금기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경기 호황으로 일자리는 매년 50만 개씩 늘었고 고용 증가 덕분에 노당자들의 임금도 함께 상승했다. 자연스럽게 가계 소득도 안정적으로 상승했다.~마이 홈을 넘어 마이 카 시대로 접어들었다.~IMF사태는 재벌 그룹 30개중 17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품백화점이 무너지듯이 말이다. 1998년 한 해 동안 127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실업자가 폭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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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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