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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befree
- 작성일
- 2010.5.19
은교
- 글쓴이
- 박범신 저
문학동네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
사람이 나이를 든다는 것은 ‘본능’을 통제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모든 걸 원하는 대로 합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칭얼대고, 아프면 울고, 기쁘면 웃습니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자라면서 아이는 점점 구별하는 법을 배웁니다. 긴 훈련을 통해 대소변을 가리고, 공공장소에서는 드러누워 떼를 쓰면 벌을 받습니다.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성질내서도 안 되고 이른바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안 되죠.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년이 되고, 장년을 거쳐 노인이 되는 긴긴 시간동안 잘 정돈된 본능은 잔잔히 이는 물결처럼 조용히 흔들릴 뿐입니다.
사회의 시선 뿐 아니라 내면의 시선 또한 ‘늙어 주책’이란 명제로 끝없이 잔잔함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일생이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겠지만 끝으로 갈수록 생기를 잃는 데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 어쩔 땐 조금 슬프기도 하죠.
시인 이적요 또한 편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천천히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요. 어쩌면 노인은 소나무가 울창한 집에서 홀로 고요히 잠들 토끼굴을 파면서 스스로를 잠잠히 소멸시키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통제된, 이제는 서서히 사그라들어야 할 본능을 찌른 것은 은교의 창槍이었습니다. 소녀에 가슴에 새겨진 창은 잘 덮어둔 통제의 껍데기를 찍어 던집니다. 창槍이란 글자가 갖고 있는 속 뜻 그대로, 흐트러뜨리고, 어지럽히죠. 그녀의 손등에서 힘차게 뛰고 있던 맥박은 시인의 존재 속으로 뛰쳐 들어와 잠들었던 그의 본능과 페니스를 벌떡 벌떡 일으킵니다.
불멸의 젊은 신부이자 영원한 처녀, 등롱같은 누이였던 소녀는 작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의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노년의 시인의 온 인생을 뒤흔들고, 돌아보게 하고, 새롭게 만드는 하나의 발화점. 음심만을 가지고 소녀를 대하는 소설이 아님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음심’이 포함되어 있기에 소설이 더욱 훌륭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은교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시인은 꽤 긴 분량의 문장으로 그녀에게 품었던 음심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날의 끔찍한 발화의 기억과 거울 속의 늘어진 전라의 몸을 바라보던 노인의 시선으로 잡아낸 ‘늙음’에 대한 고찰은 음심이 아니었다면 짚어내지 못했을 지점이었을 겁니다. 풀과 같은 육체를 목도하였습니다.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릅니다. 육체의 차이, 나이의 차이에서 출발하여 그녀와의 ‘가파른 시간의 단층’으로 나아갑니다. 그녀의 열일곱과 자신의 열일곱이 같을 수 없음이 두 사람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노인에게 단절은 육체의 무력함 뿐 아니라 격변하는 세대, 새로운 주인공을 내세우는 사회의 언저리로 물러나야만 하는 ‘단절’에 있습니다. 다른 것에 이끌리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다름’이 영원히 합일 될 수 없는 평행선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이 클수록 절망도 큽니다. 이는 소녀를 향한 노인의 연정이기도 하면서 ‘나의 열일곱을 박아 넣어, 너의 온 정신을 적시고’ 싶은 청년을 향한 노인의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성적인 욕망만이 본능의 전부가 아닙니다.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지혜를 물려주고프고, 생생히 살아가고픈 것, 무언가를 ‘원하는 것’ 그것이 본능이 아닐까요. 은교의 창을 통해 본능을 가로막았던 방패막이 찢어지고, 범람하듯 쏟아져 내리는 ‘원하는 것’들을 맞이한 노년의 시인. 이 남자의 통렬하면서 반짝이는 유일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유일한 인생,
추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이것은 이적요가 아니다, 라고 시작한 자기부정은 지식인으로 살아온 인생 전체를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출발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생으로 태어나는 탄생에 다름 아니었죠.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는 나를 알았다’ 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서지우 작품을 대신 쓰고, 세상을 조롱하고, 그런 자신을 또한 능멸한. 고고한 지식인의 자아는 깨어지고 맙니다. 은교를 데리러 가는 날 하루 종일 차 속에서 기다리고, 서지우와 은교에게 작은 거짓말을 하고, 토끼인형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가슴은 두근거립니다. 생기가 돕니다. 은교를 범하는 서지우를 증오하고 그 더러움에 치를 떱니다. 그것은 질투. 서지우와 은교 모두 이적요 시인 안에 존재하는 어떤 개념이라면, 노년의 시인이 절대절명의 순수함. 최상의 가치에 대한 결벽을 증명하는 질투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더러운 책상>을 지배하는 죄의식, 패배주의, 이들을 낳는 본질에의 결벽증이 기억났습니다. 그 본질이 이 소설에서는 바로 은교이고, 그 은교를 향해 미친 듯이 뻗어가는 그의 욕망과 숭배는 허위의식으로 가득했던 70년의 가짜 인생에서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유일한 인생’으로 다시 살게 합니다.
순수한 본질에의 욕망으로 시작된 새로운 생은 인간의 삶과 또한 닮아 있습니다. 신세계, 새로운 계절을 발견한 듯 두근거림으로 시작되지만. 2차 성징을 거치며 느끼게 되는 수치심. 자신이 아름다움을 담을 만한 그릇인가 하는 의심. 절망과 자기부정은 ‘당신, 썩은 관처럼 보여’라고 비수처럼 말한 노랑머리 청년의 한마디 말이었죠. 늙는 것이야 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라고 시인은 썼지만 늙은이가 욕망하는 것이 범죄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꼭 늙고 젊음이 아니라, 어떠한 가치를 좇기에 스스로의 바탕을 끝없이 되돌아보는 것. 그리하여 자꾸만 자신을 죽이고 싶었던 그 마음..
이전에 알던 모든 것, 이전에 썼던 모든 것의 허망함을 깨달아 마지막에 썼던 그 노트마저 은교의 손에 타 없어진 것은 그의 유일한 생을 완성 짓는 아퀴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70년 동안 알고 썼던 모든 것이 있었기에 마지막 순간에 빛나는 생이 존재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시인은 통렬히 자신의 인생을 부정했지만 그 ‘부정’으로 마지막까지 세상을 조롱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이 저는 다행스러웠습니다. 끝까지 자신이 살해했다고 믿은 서지우도 눈물을 뿌리며 사고로 죽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한 생’이 완벽한 생은 아니니까요. 말년의 깨달음으로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라고 유언하는 시인의 계획된 파괴야 말로 허위의 또 다른 이름일 테니까요.
싱싱한 행복
그러나 결국 시인은 은교와의 ‘화해’를 이루어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유폐시킨 집에 찾아온 은교와의 그 밤은 소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그애보다 죽음이 훨씬 가까운 그 순간, 시인은 고요합니다. 은교와 시인과의 관계는 일방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시인의 마음에서 촉발된 화살표가 은교를 향해 날아가는 형국이었죠. 그러나 이 밤에 고요한 시인에게로 찾아온 것은 은교였습니다. 견고한 침묵 속에서 그 애는 할아부지 맘을 쪼끔은 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알고 모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 끝없는 구애 속에서 두 사람이 어떤 소통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 저릿했습니다. 유리창에 뿌옇게 댄 그녀의 손은 그의 가슴에 가 닿았습니다. (이후, 죽음 앞에서 그녀는 그에게 ‘손 주세요’라고 먼저 이야기하고, 발을 사이에 둔 채 보자기손을 잡습니다.) 그 날 시인은 조금 울었고 그애를 욕망으로, 청춘의 보상으로 보았던 것을 자각하며 유리창을 닦습니다. 뽀드득뽀드득 닦으며 무한한 슬픔을 느끼는 시인은 며칠 새에 십년쯤 늙었습니다. 새로이 시작된 생에서 또한번의 성장을 이룩해 낸 것입니다.
결국 은교가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결말 또한 아름답습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 고 어느 시인이 말했지요. 무한한, 결백에 가까운 가치를 추구하고, 추구했던 시인에게로 은교가 다가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의외로 서지우와 이적요 사이에서 조금은 소외감을 느꼈던 그 외로운 은교가 마침내 시인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시인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시작(詩作)을 한다니. 이것이 바로 ‘싱싱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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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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