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elf
  1. 파워문화블로그 미션

이미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


- 백제왕의 사여품(賜與品)을 중심으로 -


 


 


조공(朝貢) 체제,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조공체제(朝貢體制)’는 조공질서(朝貢秩序), 책봉조공체제(冊封朝貢體制), 천조예치체계(天朝禮治體系), 화이질서(華夷秩序), 조공제도(朝貢制度)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1)”되는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체제는 오늘날 ‘외교(外交)’라고 불리는 대외적인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정(內政)’이라 할 수 있는 대내적인 관계에서도 적용되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고대국가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두드러졌는데, 종주국(宗主國)인 중앙을 대표하는 왕실과 그들에 흡수/통합된 종속국(從屬國)/부용국(附庸國)인 지배세력이었던 지방 유력자간의 관계는 이를 잘 보여준다. , 왕은 지방 유력자에게 사여품(賜與品)을 내려줌으로써 지방으로부터 군사력/노동력과 물자 등을 효율적으로 조달하고,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었고, 지방 유력자들도 왕실을 배경으로 다소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중국 주변의 국가가 중국의 전통국가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의 전통국가는 이에 상응하여 책봉(冊封)과 사여품(賜與品)을 내려주는 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백제왕의 사여품(賜與品)


 


한성시기 백제 왕실에서 지방 유력자에게 내려준 사여품(賜與品)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금동관모(金銅冠帽).


백제의 금동관모(金銅冠帽)는 현재까지 12개가 발견되었다. 화성(華城) 요리(料里), 천안(天安) 용원리(龍院里) 9호분, 공주(公州) 수촌리(水村里) 1호분과 4호분, 서산(瑞山) 부장리(富長里) 5호분, 고흥(高興) 길두리(吉頭里) 안동고분,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 1호분, 나주(羅州) 신촌리(新村里)  9호분 등 7곳과 대가야 수장층 무덤인 합천(陜川) 옥전(玉田) 23호분 및 구마모토[熊本]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등 2곳에서 출토된 9점의 금동관모(金銅冠帽)와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된 국은(菊隱) 이양선(李養璿, 1916~1999)의 수집품과 리움 박물관 소장품 포함한 수집품 2점이 바로 그것이다.


, 금동관모(金銅冠帽)가 출토된 곳이 모수국(牟水國)의 옛 터였다는 화성, 신운신국(臣雲新國)의 터였다는 천안,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마한지역의 종교적 종주국(宗主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소도국(臣蘇塗國)의 옛 터라는 서산, 초리국(楚離國)의 옛 터였다는 고흥, 목지국(目支國)이 백제국(伯濟國)에 통합된 뒤 다른 마한 소극을 이끄는 중심세력이었다는 건마국(乾馬國)의 옛 터이자 무왕때 수도 이전예정지였던 익산, 불미국(不彌國)의 옛 터로 추정되는 나주처럼 주로 마한 소국이 위치한 곳이라는 점은 앞에서 말한 백제와의 사여품(賜與品)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알려준다.


이런 점에서 근초고왕(近肖古王, ?~375)때 설치되었다가 사비(泗沘)천도 이후 오부오방제(五部五方制)로 국가체제가 재편성되면서 소멸되었다는 담로(擔魯)제도와 연결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웅진(熊津)시대에 제작된 추정되는 나주(羅州) 신촌리(新村里)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金銅冠帽)[국보 295]를 제외하면 한성(漢城)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점은 지방 세력이 점차 독자성을 상실하고 백제라는 국가체제의 일부로 편입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일하게 웅진(熊津)시대에 제작된 추정되는,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金銅冠帽).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된 이 금동관모(金銅冠帽)는 “고깔모양 관모의 전후와 좌우에 문양판을, 후면 혹은 상부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덧붙인 형태2)”의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金銅冠帽)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 오히려 반원형동판(半圓形銅板)을 좌우에서 붙여서 모자 모양으로 만든 내관(內冠)과 관테[대륜(臺輪)]를 만들고, 그 위에 입화식(立花飾)을 세우고 달개[瓔珞]와 유리구슬을 달아 장식한 외관(外冠)이 결합된 형태는 신라식 혹은 가야식 금관과 유사한 느낌마저 준다.


금동관모(金銅冠帽)



    백제왕의 사여품(賜與品)에는 금동관모(金銅冠帽)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금동신발[金銅飾履], 귀걸이[耳飾], 허리띠 꾸미개[帶金具] 등의 장신구와 장식큰칼[裝飾大刀], 중국제 도자기도 있다.

 


금동신발[金銅飾履]



백제 금동신발은 대개 금속으로 된 바닥판, 왼쪽옆판, 오른쪽옆판으로 만드는데, 양 옆판의 아랫쪽을 접어 바닥판을 결구한 뒤 발등과 뒤축에서 금속실 또는 못으로 고정시켰다. 그 결과 금동신발의 앞 코 모서리가 뾰족한 각을 이룬다. 화려하고 섬세한 백제 문화의 영향인지 백제 금동신발은 다양한 문양이 특징이라고 한다.


 


귀걸이[耳飾]



서산 부장리, 청원 주성리, 천안 용원리 등 금강 수계(錦江 水系)에서 특히 많이 출토된다.


 


허리띠 꾸미개[帶金具]



출토품이 매우 적은 사여품(賜與品)으로 몽촌토성, 풍납토성, 화성 사창리, 공주 수촌리, 연기 나성리 등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가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듯이, 허리띠 꾸미개는  고대 사회에서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물품이었다.


 


장식큰칼[裝飾大刀]



손잡이 끝에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나 형상이 표현되어 있는 큰 칼을 장식큰칼이라고 한다. 신라나 가야에 비하면 적게 출토된 사여품(賜與品)으로 오산 수청동, 천안 화성리/용원리,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청주 신봉동, 논산 표정리/모촌리, 고창 봉덕리, 함평 신덕고분, 나주 복암리/신촌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중국 도자[中國陶瓷]



중앙에서는 주로 일상용기로 사용하여 풍납토성을 비롯한 왕도 유적에 집중되어 있다. 지방에서는 위세품(威勢品)의 성격이 강해 부장용기로도 사용되었다. 사진 아래 칸 가운데에 보이는 원주 법천리 출토의 청자 양모양 그롯[羊形靑磁]와 공주 수촌리 출토의 흑유 닭머리모양 항아리[黑釉鷄首壺]는 부장용기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1) 김경록, 朝鮮時代 朝貢體制 對中國 使行”, <명청사연구> 30(2008), p. 95



2) 박민선, <백제 금동관의 양식적 특징과 문양 변천>, 석사학위 논문(2012), p. 4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3.04.26

댓글 0

빈 데이터 이미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waterelf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6.2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6.24
  2. 작성일
    2025.6.23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6.23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5.6.23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6.23

사락 인기글

  1. 별명
    사락공식공식계정
    작성일
    2025.6.20
    좋아요
    댓글
    80
    작성일
    2025.6.20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6.19
    좋아요
    댓글
    150
    작성일
    2025.6.19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6.24
    좋아요
    댓글
    97
    작성일
    2025.6.24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