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藝術/旅行

waterelf
- 작성일
- 2020.3.22
유럽 도시 기행 1
- 글쓴이
- 유시민 저
생각의길
- 평균
- 별점8.5 (256)
- waterelf
낯선 도시가 아닌 익숙한 도시
‘근대화’라는 이름의 서구화 세례를 받아서일까? 아니면 단지 편리하기 때문일까? 많은 이들이 패키지 여행이나 자유 여행으로 유럽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를 대상으로 하는 <유럽 도시 기행 1>에 손이 갔다.
여행, 그것도 낯선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것을 느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이스탄불은 좀 예외로 치더라도 저자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아테네, 로마, 파리는 낯설기 보다는 익숙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로마와 파리는 배낭여행으로 갔다 왔기 때문이고, 아테네는 저자가 출연했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 시즌 3”을 통해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저자는 두루 많이 알고 그것을 대중에서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각각의 도시를 어떻게 맛깔 나게 그려나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멋있게 나이 들지 못한 미소년 같은 도시 ‘아테네’, 뜻밖의 발견을 허락하는 도시 ‘로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같은 도시 ‘이스탄불’, 인류 문명의 최전선인 ‘파리’. 이들 도시가 저자의 말처럼 유럽문명의 DNA를 품고 있는 도시일 수는 있겠지만, 파리에 인류 문명의 최전선이라고 표현한 것은 좀 과하지 않아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아테네, 아니 그리스 전체가 어떻게 보면 조상의 영광을 팔아먹고 사는 곳.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 고대도시, 1천500년 망각의 세월을 건너 국민국가 그리스의 수도로 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p. 87]
로마.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낭만이 공존하면서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도시.
저자는 로마를 “치안이 불안하고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최악의 도시라는 로마의 오명은 이미 오래되었다. 눈 뜬 사람 코 베듯 지갑과 물건을 털어간다는 소매치기와 집시에 대한 풍문도 무성” [p. 94]하다고 표현했지만, 1996년에 내가 만난 로마는 한국 경주의 월성지구[계림, 월성, 내물왕릉, 안압지, 첨성대, 국립경주박물관 등]과 서울의 명동이 합쳐진 듯한 곳이었다.
콜로세오, 포로 로마노, 판테온 등 과거의 유적으로 관광 수입을 올리는 한편,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스페인 광장에서 이어지는 명품들의 콘도티 거리와 현지인들의 패션 트랜드를 알 수 있는 코르소 거리 등 패션 산업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모습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패션 1번지 밀라노나 메디치 가문의 고향인 피렌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한때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 등 다른 매력적인 이탈리아 도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를 비롯해 이탈리아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로마를 온전히 대신할 만한 도시는 없다” [p. 93]
그렇다면 왜 로마일까? “로마는 무엇이 특별한가? 우선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높고 규모가 큰 고대 유적이 유럽의 어떤 도시도 따라올지 못할 만큼 많다. 둘째, 세상이 하나뿐인 바티칸 교황청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품고 있다. 셋째, 19세기 후반 출현한 이탈리아 국가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의 문명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빅뱅’을 일으켰고 로마제국에서 ‘가속 팽창’을 했다. 로마는 서구문명의 가속 팽창 흔적을 지닌 도시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발전양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p. 93]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p. 165]
이스탄불. 한때 다문화의 도시이자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빛 바랜 영광의 도시.
“역사가 무려 2천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최초 이름은 비잔티움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오랜 세월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20세기에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된 후 국제도시의 면모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역사와 문화는 실종되었고, 그때 만든 몇몇 건축물만 박제당한 공룡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p. 170]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 )가 그의 자서전에 “이스탄불은 모든 것이 낡고, 한적하고 텅 빈, 흑백의 단조로운 도시로 바뀌었으며 거리에서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히브리어가 사라졌다” [p. 204]라고 묘사한 것처럼 흑백사진으로 박제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변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어 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은 것, 둘째는 터키인이 아닌 주민들이 도시를 떠난 것” [p. 204]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다름에 포용적인 다원주의 이슬람에서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 이슬람으로 변한 탓이리라.
파리. 예술의 도시 혹은 빛의 도시라고 하지만 내게는 박물관의 도시.
“프랑스공화국의 수도인 파리는 앞에서 만났던 세 도시와 달리 역사의 공간과 시민의 생활공간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으며, 오래된 건축물도 모두 살아 숨을 쉰다. 베르사유 궁전을 제외하면, 시민들의 일상과 떨어져 관광객의 볼거리로만 쓰이는 공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파리가 젊은 도시여서다. 파리는 14세기까지만 해도 보잘것없는 변방의 도시였으며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에 견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역사가 짧아 고대의 건축물이 거의 없다.” [p. 246]
이는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에서 역사 속의 사건과 역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파리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늘어놓겠다는 말인 셈이다.
약간 애매한 여행에세이
전체적으로는 저자가 출연했던 “알쓸신잡”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일반적인 여행에세이와 달리 저자의 장점인 많은 지식을 압축해서 늘어놓다 보니 이쪽 방면에 문외한인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한다는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선과 집중도가 분산되어 길을 잃고 오르는 등산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장소를 시발점으로 하는 “알쓸신잡 시즌 3”이 떠올랐다.
만약, “알쓸신잡” 시리즈를 좋아했던 이라면, 이 책은 축복일 것이다. 활자로 된 ‘알쓸신잡’을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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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