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elf
  1. 文學

이미지

도서명 표기
[eBook] 낙구침
글쓴이
희행 저
답인
평균
별점7.2 (5)
waterelf

이 소설, 장르가 뭐지?



 



희행(希行)이라는 중국 작가의 <낙구침(洛九針)>은 묘한 작품이다. ‘언정소설(言情小說)’이라는 중국 특유의 장르를 감안하면 로맨스 소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로맨스의 비중이 낮다. 다른 ‘언정소설(言情小說)’과는 달리 마라 맛 복수극도 없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보이는 묵문(墨門) 협객(俠客)들의 활약 때문에 무협의 향기도 풍기고 있다.



여기에 이야기 중간중간에 <묵자(墨子)>의 경문(經文)을 인용한 묘사와 설명은 이 소설의 정체성을 헷갈리게 만든다.



 



 



묵가(墨家) 혹은 묵문(墨門)의 몰락



 



이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묵가(墨家)의 흔적이 짙다는 점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여주인공 낙칠성(洛七星)이 묵자(墨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묵문(墨門)을 재건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묵가(墨家) 사상은 분열과 혼란의 시기인 전국시대 사상계를 휩쓸어 맹자(孟子)가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墨翟)에게 돌아간다[天下之言不歸楊, 則歸墨]”고 한탄했을 정도로 세를 과시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하나의 사상 혹은 종교가 이렇게 급격하게 몰락한 것은 드문 일이다. 불행하게도 묵가에 대한 기록은 경전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라서, 우리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단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대표되는 기득권자의 탄압, 소국을 도와 대국의 침략을 막는 ‘비공(非攻)’의 정신이 현실과 타협하면서 변질됐고 이로 인한 추종자의 이탈, ‘별묵(別墨)’으로 표현되는 묵가 지도자 그룹의 분열1), 자신의 외아들조차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에 따라 처형한 복돈(腹?)이나 봉지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다 결국 자결한 맹승(孟勝)2)같은 뛰어난 지도자의 부재 등이 작용한 탓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묵가의 조직체인 묵문(墨門)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대주(大周) 건평(建平) 3년, 진왕(晉王)이 북해군(北海軍) 대장군 양사(梁寺)와 결탁, 황제에게 신기(神器)를 올린다고 해서 태자를 유인,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신기(神器) 제작을 위해 모였던, 묵문의 장문(掌門)과 다섯 장로(長老)들도 이에 휩쓸려 살해되고 묵문(墨門)은 역적의 무리라는 낙인이 찍힌다.



 



장문이 죽고 장로도 죽고, 죽기 전에 문파 사람들더러 뿔뿔이 흩어지라는 묵령(墨令)까지 내렸으니, 자연히 몰락할 수 밖에 [2권]



 



기득권자의 탄압과 지도자의 부재, 그리고 이 소설에서 묵가의 배신자로 묘사3)된 ‘별묵(別墨)’의 존재가 이 소설에서 묵가가 몰락한 원인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묵가의 운명은 바뀐다. 새롭게 묵가의 지도자, 거자(鉅子)로 인정받은 이가 묵문의 조직은 해산하되 묵가의 정신과 기술은 전승하는 방식으로 존속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선택으로 묵가는 실제 역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묵문(墨門)의 사람들



 



묵가의 10대 주장 가운데 재정을 낭비하지 말자는 ‘절용(節用)’과 비용과 인력이 과다하게 드는 허례허식을 배격하자는 ‘절장(節葬)’은 국가의 정책에 해당한다. 묵자는 제자들에게 거칠고 허름한 옷도 감사히 입고 나막신과 짚신에 만족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는 개인적인 실천인 셈이다. 이 책에 묘사된 묵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묵자> [노문편(魯問篇)]을 인용해서 여주인공 낙칠성(洛七星)과 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묵자(墨者) 혹은 묵도(墨徒)의 ‘짚신’으로 대표되는 검소한 옷차림과 ‘콩조림[咸豆]’과 ‘딱딱한 전병[硬餠]’, ‘절임 채소[?菜]’와 ‘증병(蒸餠)4)’과 같은 소박한 식사를



 



배고픔을 헤아려 양만큼 먹고, 몸을 헤아려 필요한 만큼 입어야죠[量腹而食, 度身而衣]



거친 헝겊으로 지은 짧은 옷을 입고, 명아주 잎과 콩잎 넣은 국을 먹으면서요[短褐之衣, 藜 藿之羹] [2권, p. 557]



 



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를 보는 세간의 시선을 반역도의 낙인이 찍힌 묵도(墨徒)를 추격하는, 도찰사(都察司)의 우두머리 곽련(?蓮)의 입을 통해 드러낸다.



 



곽 도독께서 지난 번에 가르쳐 주신 묵도의 특징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짚신을 신은 이라니요. 천하에 짚신을 신은 이는 도처에 널려 있잖습니까.”



주천이 옆에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곽련도 웃었다. 이번에도 아주 짧은 웃음이었지만 입가와 눈가에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한 가지 더 말해 주지.”



곽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흡사 거지처럼 아주 검소하게 먹는다. 그래서 묵문한테는 또 다른 별칭이 있는데, 바로 빌어먹는다는 의미로 걸문(乞門)이라 부르지” [3권, pp. 112~113]



 



 



묵자는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는 ‘비명(非命)’도 주장했는데, <묵자> [법의편(法儀編)]을 인용한 여주인공 낙칠성(洛七星)의 입을 빌려



 



이건 운이 아니에요.



하늘의 운행은 광대하고도 사사로움이 없으니[天之行廣而無私]



남을 해친 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거든요 [2권, pp. 235~236]



 



라고 말한다. 북해군(北海軍) 대장군 양사(梁寺)가 거둔 여덟 번째 양아들인, 양팔자(梁八子)이자 도찰사(都察司)의 우두머리 곽련(?蓮)이 다섯 번째 공주의 부마인 류(柳) 소부감(小府監)이 나무새를 황제에게 진상하여 신임을 얻는 것을 보고



 



운이 나쁜 자는 그 언행에 문제가 있어.”



가량 양사라든가 낙 장문이 그랬다. 그들은 운이 안 좋았다. 하지만 액운이 닥친 건, 그들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어서다.



운이 좋다는 건, 자신의 능력 덕일 수도 있고…… 남이 줘서일 수도 있지.” [9권, pp. 214~215]



 



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10대 주장 같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묵가의 특징은 몇 가지 인상적인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실제 역사에서 묵가는 의리를 중시하고 이를 위해서는 목숨도 가볍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는[替天行道]’, 의로운 협객인 ‘유협(游俠)’의 선구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소설에서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소작농을 위해 수재(秀才) 유문창(劉文昌)을 살해한, 곡예를 파는 영인(伶人) 곤지룡(滾地龍)과 같은 이가 등장한다.



 



번역자의 말에서 언급되지만, 출신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높이 등용하자는 ‘상현(尙賢)’과 신분의 차이나 친소(親疏)의 구분 없이 아울러 사랑하자는 ‘겸애(兼愛)’의 주장에서 비롯된 교육관도 의미심장하다.



 



묵자는 교육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고, 농사와 길쌈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방식보다는 농사짓는 법과 길쌈하는 법을 가르쳐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묵자에게 교육은 구세 활동의 일부였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물질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낯선 사람을 찾아가 가르침을 실천하기도 했죠. ‘가르침에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수(束脩)’라는 학비를 전제로 했던 공자의 가르침과 다른 부분입니다. 묵자의 제자는 대개 속수의 예를 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합니다. [11권, pp. 731~732]



 



이처럼 이 작품, <낙구침>은 중간중간에 <묵자(墨子)>에서 인용된 말이 튀어나오는 데, 묘하게 상황과 어울려서 원래 그 말이 저런 뜻이었나 하고 고개를 기우뚱거리게 한다.



 



묵가가 절용(節用)과 절검(節儉)을 강조하지만, 그들한테는 또 다른 규율이 있습니다.



힘이 남아 있으면 함께 애쓰고 재물이 남아 있으면 함께 나눈다는 것이죠[有餘力以相勞, 有餘財以相分].



모두가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바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내놓은 재산은 적을지 몰라도, 모든 묵도가 일부를 내놓는다면 이 큰 천하에 묵가 수중으로 얼마나 막대한 돈이 모이겠습니까?”  [3권, pp. 309~310]



 



물론 각자 아껴 쓰고 남은, 잉여분의 사유재산을 묵가 공동체[이 소설에서는 묵문(墨門)]와 공유하고, 개인적인 명리(名利)를 탐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규율을 어기는 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주저 없이 처벌하는 삶은 쉽지 않다. 아마도 그래서 공동 재산을 관리하는, 5대 장로 중의 하나로 ‘재주(財主)’였던, 고소양(高蘇陽)이 ‘묵문(墨門)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묵문의 규율을 묵수(墨守)하는 장문과 다른 장로를 배반하고 고씨 가문의 묵문(墨門)을 꾀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젊은 날의 고소양은 그가 ‘재주(財主)’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 재능이 뛰어나고 묵자(墨子)의 가르침에 열심인 묵자(墨者)였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나만 옳다는 ‘정의중독’과 묵문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고소양의 말로(末路)는 우리들의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볍게 시간을 때우려 펼친 장르소설이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작품이 되었다.



 



 



옥의 티



 



11권 p. 91에



사람을 다치게 하면 형벌을 받고,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해야지[傷人者刑, 殺人者死]’를 <묵자>에서 인용한 것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순자(荀子)> [정론편(正論篇)]의 말이다.



아마도 청(淸)나라 손이양(孫??, 1848~1908)의 <묵자간고(墨子閒?)>에서 <묵자> [비공편(非攻篇)] “殺一人 謂之不義 必有一死罪矣[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불의(不義)라 하니 반드시 한번 사형당할 죄가 있다]”에 대한 주해로 나온 <순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1)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편]에 따르면, 묵적(墨翟)의 사후에 묵가는 상리씨(相里氏), 상부씨(相夫氏), 등릉씨(鄧陵氏)의 세 지파(支派)로 나뉘어졌는데 각기 어긋나고 달라서 맞지 않았기에 서로 간에 상대방을 ‘별묵(別墨; 정통 묵가라 아니다)’이라고 하였다.





2) 복돈은 진(秦)나라 혜왕(惠王, 재위 B.C. 338~B.C. 311)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아들조차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묵가의 법에 따라 처형했다. 맹승 은 양성군(陽城君)의 부탁을 받고 그의 봉지를 초(楚)나라 도왕(悼王, 재위 B.C. 402~ B.C. 381)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다가 패배하자,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3) 실제 역사에서의 ‘별묵(別墨)’이 이단(異端)의 느낌이라면, 소설 속에서의 ‘별묵(別墨)’은 배교자(背敎者)의 느낌이다.





4) 증병(蒸餠): 쌀가루나 밀가루를 더운 물에 반죽한 다음 술을 뿌리고 삭혀서 찐 떡을 말한다. ‘술떡’이라고도 한다.




좋아요
댓글
2
작성일
2023.04.26

댓글 2

  1. 대표사진

    추억책방

    작성일
    2023. 12. 10.

  2. 대표사진

    waterelf

    작성일
    2023. 12. 10.

    @추억책방

waterelf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5.31

    좋아요
    댓글
    6
    작성일
    2025.5.31
  2. 작성일
    2025.5.29

    좋아요
    댓글
    6
    작성일
    2025.5.29
  3. 작성일
    2025.5.28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28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30
    좋아요
    댓글
    184
    작성일
    2025.5.30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30
    좋아요
    댓글
    168
    작성일
    2025.5.30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6.2
    좋아요
    댓글
    109
    작성일
    2025.6.2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