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cjsrnr
- 작성일
- 2013.1.3
레미제라블
- 감독
- 톰 후퍼
- 제작 / 장르
- 영국
- 개봉일
- 2012년 12월 18일
세계 4대 뮤지컬의 영화화!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앤 해서웨이, 아만다 사이프리드, 헬레나 본햄 카터!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갑을 연 것이 아깝지 않았다.
장 발장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인가?
장 발장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카를 살리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그는,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장 발장을 대하는 세상의 시선은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사내는 19년의 노역 끝에 위험인물로 지정된다. 세상은 그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운다.
굶고 있는 조카를 보고 도둑질을 결심했을 마음 약한 젊은 청년은 선의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한 수도원에서 도둑질을 할 정도로 타락한다. 극한으로 몰린 장 발장의 행동은 비난할 수는 없으나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그와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잡혀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갈 처지가 된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온다.
장 발장이 훔친 물건을 신부가 자신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는 말에 오히려 가장 귀한 것을 안 가져갔다며 은촛대마저 선물한다. 악의와 증오로 가득했던 그의 삶에 선의와 은총이 베풀어진 것이다. 장 발장은 자신이 드디어 주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세상이 증오만을 주었기에 증오로 갚을 수밖에 없었던 남자는, 드디어 선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영혼이 살아난 것이다.
8년이 지난 뒤, 장 발장은 시장이 되어있다. 범죄자에서 존경받고, 신임 받는 시장. 극적인 변화다. 약자인 시민들을 위해 공장을 운영하고, 시민이 위기에 처하면 두 팔을 걷고 달려드는 정의로운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그의 삶은, 법에 엄격하고 범죄자에게는 가차 없는 자베르 경감이 부임해오며 위태로워진다.
(내가 알고 있었더라면... 장 발장은 괴로워한다.)
자신에 의해 창녀가 되어 죽어가는 판틴을 구해 병원에 데려가며 자베르와 한 차례 부딪친 장 발장에게 자베르는 장 발장이 잡혀 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장 발장은 자신 때문에 한 사람이 죽게 된 것을 걱정하면서도 그것으로 자신은 잡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갈등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는 증오로 가득한 장 발장을 버리고 의로운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은 시장이지만 장 발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또한 한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순간, 신부에게 구원받으며 살아났던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결국 그는 재판정에 출두해 내가 장 발장이다, 라고 외치고 만다.
결국 장 발장은 다시 쫓기는 몸이 된다. 그 와중에 판틴이 죽고, 장 발장은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힘든 도주의 길을 걷게 된다. 다행히 시장일 때 구해주었던 이의 도움으로 도주에 성공해 12년을 숨어 지내게 된다.
1835년까지 잘 숨어 지내던 장 발장은 성장한 코제트에 의해 다시 위험에 휘말리게 된다. 코제트가 사랑에 빠졌으며 그 상대인 마리우스가 혁명운동을 위해 바리케이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장 발장은 노구를 이끌고 바리케이트로 달려간다. 거기서 장 발장은 중요한 일을 두 가지나 겪게 된다.
하나는 자베르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자베르는 스파이로 바리케이트에 들어갔다가 잡혀있는 상태였다. 더할 나위 없는 복수의 기회에서, 장 발장은 자신이 자베르를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 장 발장은 자베르를 놓아주며 말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당신은 자기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시장일 때도 이렇게 말했으나 도망자의 처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에 장 발장의 변화와, 각오의 대단함이 드러난다.
또 하나는 마리우스를 구해낸 것이다. 바리케이트는 결국 무너지고, 마리우스는 총에 맞아 쓰러진다. 장 발장은 정말 죽을 고생을 하며 마리우스를 구해낸다. 젊은 청년의 미래를 위해, 사랑스러운 딸의 사랑을 위해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불태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 발장은 자신의 행동을 드러내지 않는다. 온갖 고초로 쇠약해진 몸을 쉬이려면 마리우스를 구했다는 한 마디만 했어도, 코제트의 아버지라는 위치만 말했어도 부와 평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 발장은 모든 것이 일단락된 뒤에도 코제트에게 위험을 끼치지 않으려고 자신의 비밀을 숨긴 채 수도원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린다.
마침내 그는 죽음에 이른다. 뒤늦게 목숨을 구함 받은 것을 안 마리우스가 코제트와 함께 장 발장을 찾아온다. 마리우스는 말한다. 장 발장은 성자라고. 반생을 세상의 증오 속에서 마찬가지의 증오로 대했던 남자는, 구원받은 것을 계기로 자신이 남을 구원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반생을 살았다. 마리우스, 코제트, 판틴. 자신이 구원한 이들의 배웅과 마중 속에서 장 발장은 밝은 내일, 조금 더 나은 미래의 세상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나아간다.
장 발장은 정말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수배자에서 시장까지, 극단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근력과 그보다 더욱 굳센 정신력까지. 「레 미제라블」은 한 인간이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고 하고 싶다.
다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아무래도 불행하지 않다는 말은 할 수가 없겠다. 가난하게 태어나 20년 가까이 노역으로 보내고, 시장이 되었나 싶더니 다시 수배자가 되어 숨어 살다가 기껏 키워 놓은 딸 때문에 다시 개고생을 하다가 늙고 쇠잔해져 죽어버린 것이다. 레 미제라블이라는 말이 너무나 와 닿는다.
더욱이 장 발장의 의로움과 선함은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본래가 조카를 위해 도둑질을 할 정도로 선하기는 했으나, 신부에게 구원받고 새로운 신분을 가지며 장 발장의 무의식은 두 명의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 진실한 자신을 속이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러게 된 원인인 선함에 대한 강박은 존재확립에 필요한 것이었을 거라고 본다. 장 발장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코제트에 대한 헌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는데, 장 발장은 뿌리가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코제트는 장 발장이 가질 수 없는 열매이자 분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랬던 노숙자 아저씨가!) (멋쟁이 신사로!)
휴 잭맨은 아무래도 X-맨, 울버린의 이미지가 강해서 기대 반 우려 반이었는데 웬걸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이토록 연륜과 감정이 묻어나오는 연기가 가능한 배우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표정만으로 보는 이를 함께 슬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힘이 세다는 점 역시 휴 잭맨에 어울리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있었을 때 고생한 것치고는 장 발장이 워낙 떡대가 좋아 피식했었다(캡쳐를 할 수 없는 게 아쉽다). 그러고 보면 자베르와 부딪칠 때, 처음에는 자진출두할 테니 사흘만 달라고 빌고 다음에는 하루만 달라고 빌었다. 모두 출두하지 않았다. 자베르가 괜히 사기꾼으로 의심한 게 아니다…….
자베르
(위풍당당하게 도로를 가로지르는 기병들과 그들을 올려다보는 피골이 상접한 시민들.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자베르 경감은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법의 수호자이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비천한 자는 끝까지 비천할 뿐이다.” 라고 말하던 그. 장 발장 좀 그만 괴롭히라고, 왜 이렇게 집착하느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다.
(자베르 경감. 그는 단순한 악역인가, 또 하나의 주인공인가.)
그러나 자베르는 판틴이 죽은 병원에서 “나는 비천한 출신이다!”라고 장 발장에게 외치며 자신이 왜 그리도 법과 신분에 얽매여야 했는지를 대변해준다. 그 자신이 비천한 출신이기에, 억눌린 열등의식은 엄격한 법의 집행 속에서 법과 신분의 질서가 진리임을 확신해야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칫 죽을 수도 있던 옥상난간을 걸으면서도 두려움이 없던, 얼마가 걸리든 죄인(장 발장)을 잡고 말겠다는 신념으로 가득하던 그는 장발장에게 목숨을 건지게 된다. 자베르 경감이라는 인물에게 있어 이 순간이야말로 중요한 전환점이다
.
이는 마침내 궁지에 몰린 장발장을 마주하게 되며 드러난다. 이전까지의 그였다면 그 어떤 변명도 듣지 않고 장발장을 잡아갔을 터. 그러나 한 청년의 목숨이 달렸다는 장발장의 외침에 결국 길을 열어주고 만다.
(젊은 청년들의 시체와 피를 바라보며, 아이의 시체를 바라보며 죄인에게 살려진 경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그는 고뇌하며 독백한다. 장 발장은 사기꾼인가 의로운 자인가. 비천한 출신에서 경감의 자리까지 올라 신분과 법을 삶의 의미로 두고 살아왔던 이에게 범죄자와 선함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오늘 그가 내 목숨을 살려줌으로써 내 영혼을 죽였다는 것을.” 죄인(장 발장)을 놓아준 순간, 육체는 살아있지만 자베르를 지탱해오던 믿음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강물로 뛰어드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장 발장은 자베르를 용서했으나 어떻게 보면 가장 가혹하게 복수를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러셀 크로우도 멋진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베르가 러셀 크로우에 묻힌 감이 있는 게 아쉽다. 중후하고 진지한 인물을 살리는 데는 이만한 배우도 없을 듯. 개인적으로 러셀 크로우의 눈은 정말 예쁘다고 생각한다. 파아란 빛이 나는 보석 같기도 하고. 중년남자의 눈동자가 이래 예쁠 수가 있나……. 제복간지가 뭔지 보여주셨다.
판틴
「다크나이트」에서 캣우먼으로 내 가슴을 힘껏 두드려주시더니 얼마 안 있어 결혼소식으로 가슴을 아예 부숴버린 앤 해서웨이. 미모는 어디 가질 않는다고 머리수건을 벗으며 미모 터트려주더니 머리를 밀어버렸다. 그럼에도 꽤 예뻤다는 게 세상의 불공평함.
(시선을 휘어잡는 미모. 저 수건을 벗는 순간 이미 주위는 보이지가 않는다.)
(머리를 밀면 좀 못나보여야 하는데, 세상 혼자 사는 앤 해서웨이.)
판틴이 공장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보며 느낀 것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약자는 약자가 더 심하게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끼치지 않게 하겠다고 더한 약자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모습은 너무 씁쓸했다. 두 번째는 여자가 너무 예쁘면 인생이 고달프다는 것이었다. 판틴은 예쁘다. 그것은 앤 해서웨이라서가 아니라 캐스팅에 있어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벌떼처럼 몰려들어 판틴을 내쫓으라고 온갖 험담을 하는 여공원들의 모습은 꽤 익숙한 것이다. 남자들이 뒤에서 험담 안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여자들 특유의 예쁜 여자 깎아내리기는 남자들은 따라갈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세 번째는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것이었다. 하필, 자베르가 와서 장 발장이 기겁하고 수레가 쓰러져 장 발장이 급히 나가야했는가.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전개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앤 해서웨이를 바라보는 여공원들의 시선이 사나운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나도 여자였으면 짜증났을 듯.)
결국 판틴은 머리카락을 팔고, 이를 뽑아 팔고, 결국에는 성까지 팔게 된다. 처음으로 손님을 받은 뒤, 젊었을 적의 아름다움과 남자들의 부드러운 태도를 기억하고 아이만을 남기고 떠나버린 남자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토해내는 판틴의 노래와 눈물은 처절했다.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 믿었고 신은 자비로울 것이라 믿었지.” “내가 바란 건 이 지옥이 아니야.” 짧은 머리에 더러운 피부, 일그러진 표정. 예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예쁜 여자보다 사람다웠다.
(당신은 신이신가요. 코제트를 위해 살아왔던 판틴이기에 코제트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며 지옥에서 꺼내주는 장 발장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판틴이 손님과 싸움이 일어나 자베르와 장 발장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장 발장을 원망한다. 그러나 장 발장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껴 자베르와 맞서면서도 그녀를 구하고 그녀의 딸을 보살피기로 약속한다. 그녀는 병원에서 코제트의 환영을 보며 죽는다. 그녀의 삶은 남자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고생한 끝에 창녀가 되어 병으로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불행하기만 했는가. 한때의 행복이 있었고 마지막은 구원의 손길이 내려와 희망을 가지고 죽을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후 그녀의 등장은 없다가 장 발장이 죽을 때 나타난다. 솔직히 말해서 빵 터졌다. 소리 내서 안 웃느라 고생했다. 이 뜬금없는 등장은 뭐지? 하는 생각이었다. 장 발장의 죽음, 그 마지막에 나올 정도로 그녀가 비중 있는 인물이었나? 코제트의 어머니이며, 장 발장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한 인물이긴 하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으로 끝을 냈어야 하지 않았을까. 등장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너무 뻔하고 오글거렸다는 게 문제였다. 구도부터가 진짜… 만약 내가 눈이 낮아 심오함이 담긴 등장을 오글거렸다고 느낀 것이라면, 나는 심오함 필요 없다. 그건 아니었다 진짜. 앤 해서웨이라는 배우의 비중 때문에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난 내가 중간에 졸아서 장 발장과 판틴의 연애라인을 놓친 줄 알았다. 그것 때문에 결말부에 감동과 전율을 느낄랑말랑하는데 손발도 오글오글 말려들어가서 복잡한 기분이었다.
코제트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이렇게 예뻤던가. 내게는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재발견이었다. 비중도 적고 등장도 적다. 하지만 그게 대순가. 예쁘다. 어두침침하고 우중충한 「레미제라블」속 한 줄기 빛이었다. 사실 연기 자체는 어린 코제트가 더 잘했다고 생각한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고, 부드럽게 미소 짓게 되는 코제트였다.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외모도 닮았다.
(나이스 캐스팅! 어린 코제트는 보호본능을 일으킨다.)
(예뻐도 너무 예쁘다. 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녀에게 구원은 장 발장이었다. 장 발장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뒤를 잇거나 여관의 사기꾼 부부에게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장 발장의 헌신 속에서 아름답고 착하게 자라났고 마리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s>결국 그녀 때문에 장 발장이 노년에 그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위 사람이 불행해지는 별에서 태어났나.</s>
(장 발장에게 꼭 안겨 있는 코제트. 이 구도는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나마 고생 안 하고 행복하게, 세상의 증오에서 빗겨난 인물인 것 같다. 이 모든 게 장 발장 덕분이리라. 귀하게 자라난 새하얀 백합 같은 이미지였다. 물론 어릴 적에는 고생을 좀 했지만.
그저 비바 아만다 사이프리드. 그 외에 할 말이 없다는 게 슬프긴 하다. 의미를 찾자면 판틴의 죽음, 장 발장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산 증거가 아닐까.
(엄마-앤 해서웨이- 닮아서 예쁜 코제트. 뭘 한들 안 예쁘겠냐마는.. 마리우스, 이해한다.)
에포닌
그녀는 착했다. 솔직히 솔로부분은 어떤 인물보다도 애절했다. 배우의 노래실력이 뛰어난 점을 무시할 수가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에포닌이 코제트를 질투해서 고발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마음 졸였다. 그런데 에포닌은 순정파였다. 이 사랑에 빠진 소녀를 내가 밀고자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썩었거나 감독이 <s>개객기</s>참 의도적인 연출을 한 것 같다.
에포닌의 사랑은 눈물겨워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마리우스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이토록 애절하게 헌신하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이래서 남자는 자기 눈에 들어오는 상대 외엔 보이지가 않는 생물인가보다(아랫도리로 여자를 봐서 이 여자 저 여자 간 보는 놈은 제외하고. 그건 남자가 아니라 짐승이고).
(너무나 안타까운 에포닌의 사랑)
(왜 비를 뿌려서 에포닌을 더 슬프게 하니...)
아무튼 에포닌은 마리우스의 부탁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코제트의 집을 알아다주고, 안내도 해주고, 자기 아버지에게 코제트의 집도 지켜낸다. 그리고 <s>이노무</s>마리우스가 혁명을 한다고 바리케이트까지 세우자 가슴에 천을 둘둘 말고 마리우스의 도우미가 된다. 게다가 <s>이노무!!</s> 마리우스가<s>미쳐서</s>특공을 벌이자 마리우스 대신 총을 맞고 만다. 전투가 끝난 뒤에 마리우스가 다가오자 숨겼던 편지를 건네며 비를 맞은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를 맞은 정도로는 병에 걸리지 않아요.. 죽음의 순간만은 사랑했던 이의 품에서. 에포닌은 조금이라도 행복했을까)
솔직히 이 영화의 최대 수혜자이자 새로운 발견은 사만다 바크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와 노래였고, 배역이었다. 다른 영화에서 또 매력적인 배역으로 만나기를.
마리우스
<s> 개쉐..</s>혁명과 사랑 속에서 질풍노도의 청춘을 보낸 마리우스다. 아무래도 싫다. 코제트와 사랑에 빠져서 장 발장의 노년을 거칠게 만들었고, 코제트에게 사랑에 빠져서 에포닌의 마음을 뒤집어놓더니 죽게까지 만든다. 혁명을 하겠다며 설치지만 동료들은 다 죽고, 자신은 다시 풍요로운 삶으로 돌아간다.
(지금이 편지나 읽을 때냐. 혁명은 안 해? 응? 에포닌은? 내가 절대 아만다 사이프리드 때문에 열폭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넌 뭐냐 대체. 이렇게 묻고 싶다. 코제트를 행복하게 해주고, 머릿속에 똥만 꽉 찬 기득권층과는 다른 사람이 되리라고 믿을 수밖에. 그러고 보면 마리우스와 코제트, 이 커플이 참 여럿 고생 시켰다.
(이 커플, 참 여럿 고생 시켰다.)
가브로쉬
미워할 수 없는 꼬맹이! 코제트와 함께 칙칙한 「레미제라블」을 밝게 만들고, 장렬하게 산화하신 인물 되시겠다. 꼬마들의 대장, 건방진 웃음과 태도, 혁명에 대한 의지를 가진 이 아이의 죽음에 여자분들 참 많이도 우셨다.
‘아이’라는 카테고리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조차도 하는데, 아이조차도 아는데.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가 죽음으로써, 아이를 죽임으로써, 두 집단은 극렬한 이미지의 대치를 지니게 된다.
다만 그 감동과 상관없이, 가브로쉬가 너무 예쁘게 죽어있다는 점과 총 맞을 거 뻔히 알면서 앞으로 튀어나간 점은… 뭐, ‘아이’니까. 아이답게 귀여웠고, 아이답게 발랄했고, 아이답지 않게 깨어있었고, 아이답지 않게 죽어버린 가브로쉬였다.
가장 인상 깊었을 때는, 자베르가 잠입해 가슴 졸이며 다 죽는 거 아닌가 하고 있을 때 “안녕하세요 경감님!”하며 자베르의 정체를 폭로했을 때였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아닌가.
테나르디에 부부
그나마 이 두 사람 덕분에 좀 웃으면서 영화를 봤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훌쩍거리면서 영화를 보는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이들은 욕망에 충실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악하다.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슬펐다. 혁명이 일어나도 그들은 살아남고, 의인이 죽어도 그들은 죽지 않는다. 그들은 이전까지 그래왔듯이 이후로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테나르디에 역을 맡은 사람도 정말 잘 어울렸고, 헬레나 본햄 카터는 이런 역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파이트 클럽」「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여줬던 그녀 특유의
분위기가 정말 잘 살아났다.
(헬레나 본햄 카터, 역시 살짝 정신 나간 듯하면서도 퇴폐적인 이미지는 최고다.)
이 부부는 나름 전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35년 자베르에게 장 발장의 존재를 인식시키도 하고, 마리우스에게 장 발장이 마리우스를 구해준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특히 터무니없는 짐작으로 마리우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는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코제트의 이름을 못 외워서 “우리 코렐트는…” “코제트.” “코제트는…” 하는 만담콤비적인 면도 마음에 들었다.
( “우리 코렐트는…” “코제트.” “코제트는…” 코제트의 싫어하는 표정에 아랑곳않는 능청스러움!)
그 외
프랑스의 혁명기라는 시대배경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다만 불어를 따라한 것인지 장 발장을 좡봘좡, 잔발잔,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비슷한 걸로는 자베르의 24601……. 뭔가 웃겼다. 인물들이 거의 노래로 대사를 하는 점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정말 좋았다. 따로 녹음을 한 걸 덮어씌운 게 아니라 현장에서 노래를 해서 영화를 찍었다는데 참 대단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다들 왜 이리 노래를 잘하는지. 정말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빨강은 혁명을 위한 피, 검정은 어두운 내일. 젊은 청년들의 열정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주님(신)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나오고 인물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문자 그대로 주님은 아니라고 본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그 의미로 다가왔지만서도. 작품 속에서의 주님은 인물들이 바라보고 인식하는 세상과 법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점은 그릇된 신에 대한 믿음과 삶의 열정은 좋게 쓰일 수 있는 것을 나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쓸모없는 것을 위대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베르와 장 발장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결말부는 감동적이었다.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흘러서 힘들었다. 세상이 고되고 슬프고 악하기에, 밝은 내일과 미래를 꿈꾸는 노래가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과거의 인물들이 밝은 미래를 꿈꾸는 그 노래를 보며 입맛이 써졌다. 과연 현재는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밝은 미래를 맞이했는가. 더 나은 미래는, 과연 왔는가. 그도 아니면 올 것인가. 「레 미제라블」의 혁명은 결국 동참하는 이 없는 부잣집 청년들의 놀이로 끝나버리고 노래는 현실 외에서 울려 퍼졌다. 그 점은 소태처럼 쓰고 머리를 아프게 했다.
(젊은 부잣집 청년들의 치기어린 놀이인가, 나라의 내일을 생각하는 몸부림인가)
2시간 30분이라는 긴 시간이었으나 돈도 아깝지 않았고, 시간도 아깝지 않았다. 전날 밤을 샜던 터라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닌데 전체적으로 집중하며 보았다. 주변인들은 두 번은 봐야하는 영화라는데 다섯 시간을 들여 볼만한 영화인가 하는 질문에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 번은 꼭 봐야하고 두 번은 체력 되면 보기를 추천한다.
(밝은 내일은 찾아오는가. 1835년의 프랑스를 보며 2012년의 대한민국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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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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