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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Ol
- 작성일
- 2022.4.17
겨울에 대한 감각
- 글쓴이
- 민병훈 저
자음과모음
1960년 가을 엄마 생신
2021년 봄 엄마 기일 - 내게는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었다.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매일 상상했다. 마지막이라는 건, 엄마가 떠난다는 건, 더는 내 옆에 없을 엄마의 빈자리를. 현실이 되었을 때 상상보다 무덤덤했다. 오래 아프셨고 건강한 모습보다 아픈 모습을 더 많이 봐왔던 나는 이미 꽤 담담해져있었다. '마지막'을 꽤 오래 준비해왔고 이겨낼 담금질을 끊임없이 해왔고, 그랬다. 그럼에도 빈자리는 컸다. 마지막 엄마의 평온한 얼굴을 보았으니 되었다. 고통 없는 깊은 잠에 빠져있는 당신을 보았다. 되었다. 스스로 위안했고 민병훈의 소설인지 실제인지 한 구절(P.18 1955년 겨울 아버지의 생일, 2005년 여름 아버지의 기일)에 내 기억은 온통 '엄마'와의 마지막 기억을 회귀했다. 소설의 힘이란 이런 데 있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온전히 내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해도 어느 한 부분에서 격하게 공감하고 습득하며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 완전한 받아들임이란 없다. 완전한 이해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는 욕심도 아니다. 그저 공감할 수 있는 부분, 지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힘은 작동한다.
『겨울에 대한 감각』을 읽으며 글의 힘, 소설의 힘을 처음부터 강하게 느꼈다. 무척이나 작은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에도, 의식의 흐름대로 감각으로만 나열된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민병훈의 소설은 아주 불친절하다. 앞서 말했듯이 '감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의식의 흐름대로, 때로는 무질서하게 나열되는 단어와 문장의 서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이해'를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해'를 독려하고 있다는 표현 자체도 백번 양보해서다. 십중팔구 '이해'할 마음이 없다면 한 페이지라도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오거나 견뎌낸 무수한 반복의 일상-시간, 세월이 응집된 결정체가 오롯이 현재로 존재한다. 현재라는 지금은 앞으로 몇 시간, 며칠, 몇 년이 남아있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내일, 당장의 몇 분 후가 끝일 지도. 삶은 그렇다. 당장을 알 수 없고 끝이 보이지 않기에 살아볼만하다는 것, 민병훈의 소설 또한 그렇다. 서사가 없고 결론도 없다. 때문에 읽는 독자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저자와 같은 맥락의 결말이 아니어도 좋다. 소설의 힘은, 이야기의 힘은 읽는 자가 길어올려야 할 우물이다. 작가의 손에서 떠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에 어떻게 읽어내든,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정답지는 없다고 본다. 단어와 문장의 나열을 통해 읽는 사람이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이 곧 '정답'이 되고 '결론'이 된다. 순수하게 내 것으로 받아들일지 단지 '글' 자체로 남겨둘지도 읽는 사람의 몫이 되는 것이다. 두루뭉술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감상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결말이 존재하는 게 소설의 힘이자 민병훈의 소설집 같은 끝맺지 못한(어쩌면 않은) 이야기의 진정한 '끝'이 아닐까. 내 생각은 그렇다.
P.21 따지고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상관. 연관. 한없이 생각하면 모두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걸 끊어내기엔 계절이 제격이었지. 한 계절에 오랜 머무르는 상상을 했다. 오래 머무른 것처럼 시간이 지났지. 겨울이 왔네, 말하지 않았지.
소설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하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상상하지 마라. 살지 못한 삶을. 내 시간과 타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만 경험의 차이는 다른 시간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민병훈의 소설을 이해하고자 안간힘 쓰지 마라. 소설 속 '나'가 겪은 감각의 흐름은 '그'의 시간이지 '나'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태 소설과 나의 '일치'를 경험해왔다면 민병훈의 소설집에서는 '불일치'를 전제해두고 읽어내면 된다. 치환되지 않는 삶의 다양성도 분명 존재하므로. 차이와 다양성의 시선,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 어차피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현실과 소설은 다르다. 소설이 현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전제한다 해도 현실은 소설의 '벽'을 넘지 못한다. 소설과 현실의 차이이다. 단지 소설은 현실의 일부분을 반영할 뿐이다. 얼마나 반영할지 아예 배제할지는 순전히 작가의 펜 끝에 달려 있다.
탄생, 삶, 죽음. 이 안에 내재된 가쁨, 고통, 희열, 고뇌, 애환, 시종일관 담담한 글쓰기로 나열하듯,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뿐인 세 편의 단편과 한편의 에세이. 세 편의 단편은 각기 다른 이야기이지만 '감각'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닮아있을 수밖에 없다. 일상의 감각을 죽음이라는 중첩을 통해 일관성 있게 하지만 무심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마지막 에세이는 자신의 성향, 특징 등을 담담하게 술회하는데 에세이를 읽다 보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퍽이나 닮아있다고 느꼈다. 성향을 떠나 특징적인 것들이 그랬다. 이를테면 왼손잡이라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이성적인 시선, 시크한 듯 유머는 잃지 않는 것,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의식 가득한 시선일 뿐이지만 말이다.
탄생이 있으면 삶의 여러 굴곡이 있고 끝에는 죽음이 있다. 탄생과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삶-살아감 그 자체는 어느 정도 의지와 인력으로 방향이 정해질 때가 있다. 경험하는 것이 그렇다. 표제작 <겨울에 대한 감각>에서는 화자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무수한 경험이 등장한다. 어머니와의 여행이 있고 아버지의 죽음이 있으며 삶을 지나간 사람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감정'이 아닌 오로지 '감각'적으로 서술된다. 감정이 아닌 '감각'으로만 서술되는 이야기는 의외로 담담하고 차갑다. 감정을 배제한 일련의 '사실'을 감각으로만 전달하는 소설은 당혹감이 앞서지만 반복해서 읽다 보면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게 돼서 색다른 경험이 되기도 한다. 두 번째 단편 <벌목에 대한 감각>은 과거 벌목작업을 하다 사고로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화자가 벌목이 한창 진행되는 산 인근 고모의 집에 머무르게 되면서 겪는 감각을 다룬다. 자신의 실수가 빚어낸 과거와 벌목이 이루어지는 현재가 맞물려 중첩되는 화자의 심리가 불안을 최대한 배제한 채 서술되는데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만 집중하고 있기에 엔딩이 다소 반전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불안에 대한 감각>은 선원인 화자가 등장하고 여기서도 사고로 인한 죽음이 등장한다. 감각에 의존해 무심히 지난 날을 회상하는 화자에게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얼핏 느낀 것도 같다.
세 편의 단편 모두 공통적으로 '죽음'이 있다.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인생사를 관통하는 건 '순리'라는 것이다. 순리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감정을 배제한 감각에 의한, 오직 감각에 의하여 서술해가고 있다. 『겨울에 대한 감각』은 누구에게나 신비로웠던 탄생을 소멸이라는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모든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죽음은 결국 감정이 아닌 감각으로 실현해낼 수밖에 없다. '나'의 죽음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이고 이는 결국 살아있는 혹은 살아내는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삶의 끝맺음이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남은 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목도한 자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때문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살을 에는 추운 겨울은 현실이 된다. 그들이 떠난 모든 계절이 겨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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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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