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

깽Ol
- 작성일
- 2016.2.29
책 읽어주는 남자
- 글쓴이
- 베른하르트 슐링크 저
시공사
소설은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순전히 개인의 기준으로 판가름나겠지만 누구도 누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니 완벽한 이해란 없다. 도덕과 윤리와 직결된다면 이는 더 어려운 것이 된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는 사안이라면 그 무게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법으로 심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법으로 죄질을 결정하기 이전에 한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까. 이는 개인과 사회의 기준을 동일선선상에 놓고 생각해봐야 하는 게 우선이다. 개인으로는 용서할 수 있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용인할 수 없다거나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서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을 갖고 있다.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앞에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것들 앞에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135쪽
미하엘과 한나는 2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을 한다. 소설은 과거를 회상하는 총 3장으로 구성돼있는데 1장은 미하엘과 한나의 만남부터 평화롭게 사랑했던 시기, 즉 한나로 인해 미하엘의 삶의 기준이 바뀌고 그녀에 잠식된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시기를 묘사한다. 2장은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한나와 미하엘의 몇 년 후 재회로 이루어지는데 그 장소는 재판장이다. 3장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한나, 화자인 미하엘이 과정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자문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3장은 결말 부분이라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소설은 화자인 미하엘의 시점으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한나의 심정이 궁금할법하다. 그녀의 선택, 심경변화 등은 미하엘의 추측으로만 알려질 뿐이고 독자의 상상에만 맡겨져 있다. 아무래도 나치 전범이라는 죄질과 제3제국 시절의 사안에 대해 죄인의 입장을 대변하기란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신 독자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리며 정의와 이해 용서의 기준을 나름 정의하도록 한 게 아닌가 싶다.
삶을 떠도는 무수한 선택이 삶의 마지막을 결정한다.
삶은 수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선택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한나의 선택이 그렇지 않았을까. 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 때문에 갈림길에서 선택한 최선은 그녀의 남은 평생을 어두운 터널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미하엘의 선택은 어떠했을까. 한나를 만나러 가기로 한 선택이 앞으로 다가올 그의 삶의 자세를 바꾼 것은 자명하다. 황달 때문에 길거리에서 구토하던 자신을 구해준 한나를 만나러 가기로 한 선택. 지멘스에 재직하던 중 승진 기회가 왔음에도 치부 때문에 친위대에 지원한 한나의 선택. 불이 난 교회에 갇힌 여성 수감자들을 구하지 못했던 선택. 선택에 따른 책음으로 인생 항해는 걷잡을 수 없는 풍랑을 만나고 조용히 쇠락한다. 한나의 선택은 인간으로서의 용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사회적 용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개인 대 개인 간의 용서는 허용될지라도 개인이 모인 집단, 사회에 끼친 파장,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선택은 용서하기 어렵다. 자발적 처벌, 자발적 응징을 가한 한나의 삶이 안타까운 이유이다. 어떤 것도 생명 앞에서 선택의 잣대를 드리워서는 안 된다. 같은 인간으로서는 더욱. 물론 이것은 포괄적인 의미이고 범죄자의 단죄 앞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한나는 당연히 유죄이다. 사형을 선고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한나를 종신형에 처하면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전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법정에서 한나의 목소리로 되묻는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라면, 당신이라면 한나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누구에게는 하찮더라도 누구에게는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치부, 어린 시절 삶의 고통을 환기하고 싶지 않은 결과물의 치부라면 말이다.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한나를 통해 남자가 되고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믿게 되는 미하엘. 거만함과 냉소, 삶의 허무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의연하게 삶을 살아가지만 내면의 열정은 죽어버린 거다. 한나를 잃음으로써. 법정에서 다시 만난 한나를 보고 무감각했다고 회상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기를 떠남으로써 배신했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먼저 배신한 것은 자신이다. 한나가 자신의 인생에 없는 사람으로 행동한 것은 먼저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의 행동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나와의 즐거웠던 한때, 그들의 만남은 한나에게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 일종의 만남의 의식이었다고 회고한다. 한나가 18년 동안 수용돼있을 때 그는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수시로 보낸다.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배신'에 대한 참회의 텍스트이며 그녀를 법정에서 '구'해내지 못한 데 대한 해명의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녹음테이프를 보내는 동안 단 한 통의 편지나 직접적인 메시지는 남기지 않는 선택을 한다. 후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짐작도 못 한 채 말이다. 이렇듯 소설 안에서는 우리가 때로는 하찮게, 별 의미 없이 하는 수많은 선택 혹은 결정이 삶을 어떻게 재단하고 이끌어가는지, 어떤 결과로 치닫게 하는지 묵직한 성찰을 던진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한나. 그녀의 마지막 선택. 스스로 단죄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선택으로 결정한 것이겠지만 미하엘이 조금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면 좋았을 텐데. 혼자서 속으로만 고뇌하고 이해하며 남들과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되뇔 뿐이었으니. 그가 했던 최선의 행동이 처음 그녀를 만나서 사랑했던 시기처럼 책 읽어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나의 입장에 이입되면 야속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당신은 도대체 뭘 알고 싶은 거지요? 인간들은 격정이나, 사랑 또는 증오 때문에, 아니면 명예나 복수를 위해서 살인을 한다는 것,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또는 권력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요? 전쟁이나 혁명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는 것도요?"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지만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죽인 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당신은 그 말을 하려는 거죠? 그들 사이엔 미워할 까닭도 없었고 전쟁도 없었다고 말하려는 거죠?"
나는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맞지만 그의 표현 방식은 옳지 못햇기 때문이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들 사이엔 전쟁도 없었고 서로 미워할 까닭도 없었어요. 그러나 사형집행인 역시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죽이는 겁니다. 명령을 받았기 때문인가요? 그가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내가 지금 명령과 복종에 대해서 그리고 수용소의 요원들은 명령을 하달받았고 또 그들은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나요?"-192쪽
『책 읽어주는 남자』는 남녀의 사랑이 역사와 맞물리면서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는 과연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이 했던 폭력적이고 파렴치한 인간답지 않았던 일련의 행위들은 결코 용서라는 차원으로 해명될 수 없다.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 보면 얄팍한 이해의 수준 정도로 이해될 수는 있어도 말이다. 한나와 미하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의 차원 정도이다. 미하엘 역시 한나를 이해하지만 진정한 용서의 손짓을 하지 않았듯이, 국가적 범죄를 개인의 단죄로 치환하는 차원의 텍스트 앞에서 쉽게 '용서'한다는 말과 '이해'한다는 말을 내뱉기 어렵다. 저자 또한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듯이 말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나가 될 것인지, 그에 반하는 반역자가 되어 처형당할 것인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자로 남을 수 있을까, 누구도 바로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당당히 나는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 문학을 읽을 때면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올려놓은 답답함이 남는다. 소통을 거부하고 수동적 삶을 받아들인 한나, 그녀가 왜 그런 삶을 수용하게 됐는지를 되짚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도 무고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린당한 인권이 먼저인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을 개인의 선택이자 책임으로 돌려서 정당화 혹은 합리화할 수 없음을 이미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일 또는 저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졌어. 그리고 넌 알 거야. 그 누구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들은 나를 이해하거든."-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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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