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
홍유
- 작성일
- 2021.9.26
불쉿 잡
- 글쓴이
- 데이비드 그레이버 저
민음사
불쉿잡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병화 옮김)
평점: 10 , 한 줄 평: 현대의 자본론을 새롭게 내놓아야 할 때.
들어가기에 앞서 책의 이름이 궁금해서 들어온 사람 중에
불쉿잡이란 말이 생소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불쉿잡의 정의부터 쓰고 시작하겠다.
불쉿잡의 최종적 정의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다. 그가 고용 되려면 그 직업의 존재가 전제 조건인데도 말이다.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한다는 의무를 느낀다.
우리 주변에는 불쉿잡이 얼마나 만연해 있을까?
얼마나 필요 없는 직업들이 재화를 창출해나갈까. 불쉿잡 자체가 책에서도 언급하고 정의 내렸듯 굉장히 모호하고 주관적인 단어이다. 누군가는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관심사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하게 느껴 불쉿잡이라고 여길 수 있고 누군가는 철저하게 무의미한 직업에서 일하면서도 시간을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불쉿잡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볼 때에는 무엇이 불쉿잡이고 나는 불쉿잡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말고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 가치를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보는 것이 옳다.
첫 장을 펼 때만 해도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며 필요 없어지는 직업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가벼운 책이라고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철학적이고 경제학적 사고를 필요로하는 ‘노동 가치와 사회현실’의 문제를 가감 없이들어내며 그동안 사회에서 쉬쉬하고 묻어놨던 이야기를 통쾌하게 파헤친다.
노동은 생명이요, 사상이요, 공명이다.
-빅토르 위고-
이 책을 더 깊게 이해하며 보고 싶다면 책을 읽기 전 노트를 들고 당신의 생각을 써보기를 바란다
첫 번째 질문은 ‘일’은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두는가.
두 번째 질문은 노동 가치는 현재와 과거가 같은가.
세 번째 질문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무의미한 직업이란 어떤 것들이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노동의 사회적 가치와 봉급 수준의 격차와 빈부격차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쉿잡의 목차를 보며 하나씩 답변하고 생각한 뒤에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적어도 이 질문에 간단한 대답을 한 후에 책을 읽으면 자기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노동과 경제성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쓴 책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불쉿잡과 일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모든 방면으로 노동을 바라보는 만큼 넓은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애매한 문장도 있었지만, 이 책을 추천하고 꼭 읽어봤으면 하는 이유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토록 찬양받은 일(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인간의 성장동력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일’이었다.
일함으로써 살아가고 생존해 나아갔는데 그럼, 일은 생존 도구의 형태로 보아도 되는가.
그보다는 더 복잡하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활동의 구실 일수도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일을 하며 어떻게든 사회적 활동을 해야만 하는데 생존을 담보로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게 주어지는 도구가 현대사회에 와서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쉿잡의 사회적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영국의 부유한 가문들은 풋맨을 고용했는데 풋맨의 유일한 업무는 제복 차림으로 마차를 따라 달리면서 도로가 울퉁불퉁하지 않은지 살피는 것이었다.
영국의 부유한 가문들은 정말 도로의 상태를 확인하려 풋맨을 고용했을까? 아니다. 이런 종류 하인은 보통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부를 강조하고 강한 인상을 만들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우위의 선점을 알리기 위해서 고용되었다. 이를 현대에 대입해보면 지금도 이 같은 상황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우리는 쉽게 사람들은 기업의 직원 수만을 보고 그 기업의 척도를 판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로지 성장성과 안정성을 보려면 직원 수를 보고 기업을 판단하는 일이 익숙한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업이 안정성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경제적 우위를 선점하려면 직원들의 일 분배와는 상관없이 일단 적정 기준의 직원 수를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통 일의 분배는 직원을 뽑고 난 후부터 시작이 된다. 과연 직원을 뽑은 후에 그 직원이 할 일을 정하는 것이 옳은 일 인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게 된다.
또한, 필수불가결로 교육의 격차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가치와 그 대가의 금액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옹호하는 사회 현상을 그만둬야 하는 시점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은 사회적 가치가 높은 직업을 깎아내린다. 지금 당장 기업의 산업변호사들과 보험을 광고하는 텔레마케팅과 컨설팅, 기업의 로비스트나 금융컨설턴트가 한순간에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사회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환경이 나빠지고 잘못되었으며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환경미화원과 간호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적어도 7일 안에는 온 동네가 쓰레기 밭이 되어 끔찍한 악취를 자아낼 것이다. 미국에서도 환경미화원들이 열흘간 파업한 결과 그 일대에 쓰레기들이 컴컴히 쌓여 큰 불편함을 겪은 일이 있지 않은가.
노동 가치에 대해 말하며 로비스트가 하는 일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환경미화원에 비하여 철저하게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노동은 사회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는 만연한 인식 속에 폄하 당하는 행태가 옳은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다.
왜 환경미화원과 간호사는 사회적 가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차별받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생산적이고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으며 유용한 직업인만큼 그것만으로 직업적 의식을 가지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사회적 가치가 높은 직업을 얻었다고 감사하라는 이야기인가, 그러기엔 딱히 사회적 인식은 바닥이지 않은가.
또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학력’일 것이다. 아마 간호사는 정해진 교육을 받고 국가시험을 통해서 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만 이는 ‘여초 직업’이라는 사회적 차별 시선과 더불어 전문대를 (즉 내신등급이 낮음에도 학교를 들어갈 수 있다는 시선) 졸업하고도 간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도 어느 정도 받쳐준다. 또한 학력 중심사회는 학력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빈부격차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교육의 격차가 커져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받던 학생들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고작 19년을 살고 남은 80년을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열리는 것이다. 적어도 진짜 그들의 수준과 성실성과 사회성을 판단하려면 30년을 두고 봐야 하는 것을 학교생활 12년에 함축시켜보면서도 그것이 올바른 수순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낳는 결과가 반복되는 것이다. 또한 교육의 빈부격차는 경제의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더 극심해진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학자들을 위해, 학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장인 길드였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학문을 생산하고 새 세대의 학자를 훈련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 정부가 대체로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대가로 대학은 공직자를 훈련해 주었다. 하지만 긴즈버그의 주장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대학의 행정관들이 대학의 통제권을 교수진에 빼앗아 그 기관을 완전히 다른 목표를 향해 운영했다. 지금은 학문이나 수업에 관해 일언반구없이 학생 경험, 연구 탁월성(장학금 따기), 기업이나 정부와의 협업 등에 장황하게 떠드는 ‘전략적 비전 자료’ 따위를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대학 활동에 자율적인 학문 활동과 목적에 집중하는 것보다 직업과 기업을 위해 불필요한 측면을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편익을 맞춘 직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터무니없을 것이다. 다만 ‘아무 가치가 되지 않는 일’ 그러니까 생산성이 없는 일을 의심하고 멀리 둬야 하지 않을까, 돈을 버는데 생산성이 없다면 (- 사람이 정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있는 활동을 계속함으로) 그 사실만으로도 노동의 격차가 심화하는 쓰라림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노동의 격차는 어떨까?
노동의 격차는 불쉿잡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노동의 생산성에 기초하는 활동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요구받은 것을 생산할 때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거나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 와서 일한다는 개념이 고용주는 직원의 시간을 소유했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문제다. 그 시간을 생산성이 없는 일을 하더라도 그 시간을 소유한 고용주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터무니없는 일을 강조 받게 되어도 시간의 소유라는 입장에서 보면 노예처럼 무엇이든 자기 일에 할당된 것이 아니더라도 해야 한다. 시간을 소유한다는 고용주와 기업의 마인드 자체가 직원들이 하는 일에 생산성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 일이다. 시간의 소유라는 생각이 주인과 노예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의미한 일을 계속해서 창출해내는 것은 권력의 행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동력에 월급이 아니라 회사에서 얼마나 말을 잘 들었냐에 대한 충직함이 월급으로 받는 것이 현대판 계약 노예 제도가 아닐까. 실업률이 극심한 지금 청년들에게는 이런 노동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현실 사회이다.
애초 그런 직업이 아니면 돈을 벌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하는 질문의 대안 질문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불쉿잡은 많은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일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기업이 이윤이 적어지고 일을 불확실하게 수행하면 기업의 이익이 많아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하고 있는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윤리와 도덕적 잣대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대치의 이익을 남기려 비효율적인 일을 강요하여 불안정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기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노동에 대한 의논을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높아지는 실업률과 취직의 어려움,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들을 이해하려면 해결책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 보다 그 근본적인 노동과 사회현상을 현대 사회에 맞게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빅토르 위고의 노동은 생명이고 사상이고 광명이었지만 지금도 노동은 광명이고 생명일까
사회활동에 있어서 드는 무력감과 직업에 대한 한탄이 많아졌거나 사회현상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을 보고 싶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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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