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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보
광해,왕이 된 남자
감독
추창민
제작 / 장르
한국
개봉일
2012년 9월 13일
평균
별점8.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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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앞으로 <광해>로 줄임)는 2012년 가장 성공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도둑들>과 더불어 천만 관객을 넘어섰고, 국내에서 이런저런 상도 휩쓸었다. 상을 타도 너무 많이 타서 구설수에 오르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볼만큼 봤으니, 편하게 소감 한 마디 적어두고 넘어가고자 한다.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한 소수의견


 


천만 명이나 열광한 영화 앞에서 이런 소수의견을 내놓는 게 송구스럽지만, 나는 <광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불쾌했다.


 


권문세족의 암살 기도로 광해군이 혼수상태에 빠져 그를 닮은 가짜 광해군더러 왕 노릇하게 했더니, 이 친구가 궁궐 생활에 좀 익숙해지자 양반들이 반대하는 대동법 실시를 강행하고, 후금과의 전쟁을 위해 파병을 요구하는 명나라에 대드는 발언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 대략 이런 스토리다.


 


화사한 궁궐 장면의 불편함


 


영화 화면은 깔끔하고, 궁궐의 처마는 날렵하고, 단청은 단아했지만, 다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장면들이었다. 하긴 이 영화 어디서도 팩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긴 했지만.


 


광해군 집권 초기는 왜와의 전쟁이 끝난 지 10년 남짓한 시점이어서 불탄 궁궐이 아직 다 원상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경복궁 중건은 선조는 물론 광해군 때까지 엄두조차 못 내었다. 선조 때 시작한 창덕궁 복구는 광해군 즉위년에 겨우 인정전만 완성되었다. 전반적으로 궁궐이 공사 중인 상태였다. 전쟁은 왕의 거처까지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는 정동 월산대군의 사저를 개조한 경운궁(덕수궁)에 살았고 광해군도 창덕궁 인정전이 완공된 뒤에도 7년이나 더 경운궁에 머물다 창덕궁에 들어갔다. 영화에서처럼 공원 같은 아름다운 궁궐이나 문무백관이 머리를 조아리는 고대광실은 광해군의 활동 공간이 아니었다.


 



 


    광해군 집권기 조선 사회는 아직도 전쟁의 참상과 죽어간 이들의 억울한 원혼이 떠도는 듯 암울했다.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을 보면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삶의 터전을 꾸려가야 했던 광해군 집권 시기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짙게 느낄 수 있다. 중음신의 소굴 같은 세상.


 


화사한 봄날의 한바탕 꿈같은 영화 <광해>는 광해군 초기의 실제 사회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딴 세상 이야기이다. 그 시대를 찍으면서 산뜻하고 깔끔한 고궁 같은 궁궐을 보여주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 뒤인 1960년대 서울의 거리를 보여주면서 2000년대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찍고 그게 1960년대라고 우기는 식이랄까.


 


허균을 광해군 시대의 일인자처럼 그려놓은 설정이나, 가짜 광해군이 궁녀들 굶지 않도록 수랏상을 덜 먹는다는 설정도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것들이다.


 


이런 건 사실 아주 사소한 트집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팩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영화인데, 이런 사소한 지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쟁터에서 백성과 함께 한 광해군


 


먼저 광해군이 어떤 사람인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광해군 이혼(李琿)은 1575년 선조 이연(李昖)의 첩인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첩의 둘째 아들이니 적서 차별이 엄격한 조선에서 썩 좋은 태생은 아니었으나, 광해군은 임진년 조일전쟁이라는 격변의 덕을 보아 17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92년 4월13일 20만의 왜군이 부산포로 들이닥치자 선조는 일찌감치 피난 보따리를 쌌다. 4월28일 수도 방어에 관건이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부대가 왜군에게 패하자 신하들은 민심 안정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하라고 건의한다. 다음날인 4월29일 선조는 피난지 평양에서 17살인 광해군 이혼을 급히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에게는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라는 형이 있었으나, 성격이 급하고 거칠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광해군이 세자에 봉해지는 행운을 누렸다.


 


 


 


세자에 봉해지는 게 꼭 행운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 선조 이연은 의주를 향해 줄기차게 북쪽으로 달아났지만, 광해군은 선조와 영변에서 헤어진 뒤 전쟁터로 돌아가 군사들과 백성들을 독려했다.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 임시로 나라 일을 대신한다는 뜻) 직위를 가지고 ‘분조(分朝, 임시 조정)’의 책임자로서 선대 임금들의 위패를 모시고 평안도와 강원도, 경기도 등지를 돌았다.


선조는 의주에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인 요동으로 달아날 생각을 했다. 도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 양반, 백범 김구 선생처럼 중국을 한 바퀴 돌면서 망명정부를 꾸리라 해도 꾸릴 사람이었다. 평양에서는 도망가는 선조의 행렬에 대해 백성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 이진은 함경도에서 백성들에게 붙잡힌 뒤, 이들이 임해군을 왜군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왜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나라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을 때 광해군은 분조의 책임자로서 백성들과 가까이 있었다. 그의 존재는 사림과 백성들에게 조정이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었고, 의병운동 등 저항의 구심점 구실을 했다.


광해군 이혼은 임금과 조정의 체면이 깊은 나락에 처박힌 치욕스러운 시절에 청춘의 절정기를 보냈다. 그것도 ‘분조’를 책임지는 왕족이자 왕세자로서 이 시기를 처절하게 겪었다. 이런 체험이 그의 인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훗날 광해군이 양반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대동법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생은 물론 평민들의 삶까지 근거리에서 접했던 특별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명나라 지원군의 오만과 횡포


 


광해군은 조선을 돕겠다고 들어온 명나라 군대의 횡포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지배층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것은 조선을 돕겠다는 것보다 명나라를 치겠다고 북상해 오는 왜의 위협을 조선에서 미리 차단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었다. 전쟁을 명나라에서 치르는 것보다 조선 땅에서 치르는 게 명나라 처지에서는 직접적인 피해를 면할 수 있으니 훨씬 낫고, 조선에 대해 전쟁 부담금을 요구할 수도 있으며, 조선을 도왔다는 생색도 낼 수 있었다. 일석삼조다.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온 이여송(李如松, 리루쑹)과 송응창(宋應昌, 쑹잉창)은 왜와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선을 조선 땅에서 적절히 억제하고 시기를 보아 왜와 적당히 강화협상을 맺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명나라의 지원군이 오면 왜를 격멸해 삼천포 앞바다까지 쓸어버릴 것으로 기대했던 선조는, 유성룡을 이여송과 송응창에게 보내 왜와의 결전을 촉구했다. 송응창은 “싸우려면 너네나 싸우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군은 심지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권율 장군을 잡아다 곤장을 치려고 했다. 명군의 허락 없이 함부로 왜군을 공격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할 때는 조선군이 왜군을 추격해 보복할 것을 우려해 명군이 왜군을 에스코트하는 황당무계한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선조 이연은 명나라의 연대장급 지휘관과도 맞절을 해야 하는 왜소한 존재로 떨어졌고, 입만 열면 “명나라의 은혜로 나라를 다시 세웠다”(이른바 ‘再造之恩’)고 명을 칭송했다. 이건 선조 개인의 수치를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와 역사의 수치이다.


 



 


광해군과 명나라의 악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명나라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니라 둘째인데 왜 세자로 책봉했느냐고 물고 늘어졌고,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도 사신을 보내 왜 임해군이 왕이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세자 결정에 대해 명나라가 크게 간섭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나, 광해군의 경우는 전쟁 시기와 겹쳐 가장 극심한 간섭을 받은 사례이다. 광해군은 오만불손한 사신들의 입을 뇌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악몽 같은 체험이 광해군의 심성에 어떤 앙금을 남겼을 것인지 또한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훗날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만한 대국 명나라의 추악한 실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 그의 처절한 경험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대주의에 빠진 구제불능의 골통 유생들은 “어찌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준 명나라에 대해 그렇게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고 했지만, 광해군이 보기에 그런 논리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지극히 가소로운 잠꼬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복권당하지 못한 비운의 개혁군주


 


광해군은 조선의 왕 스물일곱 명 가운데 가장 불행한 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피난보따리 싸는데 급급했던 그의 아버지 선조나, 국제 정세에 눈이 어두워 멋도 모르고 허황된 명분만 내세우다 여진족에 짓밟혀 치욕적으로 머리를 찧으며 항복한 인조 같은 지질한 왕들에 비하면, 광해군은 그 험난했던 시기에 어떻게 하면 전쟁을 피하고 실리를 추구해 나라와 백성을 살릴 것인가를 고민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른바 ‘인조반정’이라는 서인 일파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끌어내려져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광해군 일기> 등 공식 기록은 모두 서인의 시각에서 쓴 것들만 남았다.


예를 들어 1610년(광해군 2년) 주부 벼슬을 지낸 유대조라는 사람이 올린 상소에는 광해군이 임진년 조일전쟁 당시 분조를 맡아 백성들과 의병운동을 독려한 일들이 매우 상세하고 긴박감 넘치게 서술되어 있다.


 



 


유대조의 상소문이 실려 있는 태백산본 <광해군일기> 1610년의 기사.


 


 


 이 귀중한 자료는 중초본(2교본)인 태백산본 <광해군 일기>까지는 실려 있지만, 정초본(3교 확정본)인 정족산본에는 깡그리 삭제되어 있다. 이는 조일전쟁 당시 선조를 따라 피난 가는 대신 분조를 이끌었던 광해군의 활약이 서인들에게도 크게 부담스럽게 작용했음을 방증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조선 왕조가 멸망하는 날까지 끝내 복권이 되지 않아, 세종이니 태조니 하는 ‘종’이나 ‘조’가 붙는 묘호를 끝내 얻지 못하고 ‘군’으로 남았다. 조선이 남쪽의 왜와 북쪽의 여진에 의해 요동치고 들끓던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뜨겁게 살다간 광해군 이혼은 오늘날까지도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쓸쓸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팩션 영화와 개연성


 


이제 영화 <광해>를 보면서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정리해보자.


 


역사에 허구를 도입해 영화를 만드는 건, 남의 조상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는 한, 창작의 자유에 속한다. 허구가 가미되지 않는 역사극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도 <헨리 4세>, <헨리 5세>, <리처드 3세> 등과 같은 걸작 사극을 쓰면서, 평민 폴스타프 같은 허구의 인물을 통해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고 역사를 더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개연성이 있는 허구는 되레 작품을 더 빛나게 한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팩션’ 영화는 개연성에 대한 고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너무도 아쉽다. 영화를 너무 쉽게 만든다는 생각을 감추기 어렵다.


 


원작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조보에 감추어야 할 일은… 내지 말도록 하다”(事涉可諱者,… 勿出朝報)란 기사가 있는 것을 근거로, 광해군이 무언가 감추어야 할 일을 추진했으며, 그게 평민 속에서 광해군을 닮은 사람을 찾아 가짜 왕 노릇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설정한다.


그러나 “조보에 감추어야 할 일은 내지 말라”는 지시는 즉위년부터 1610년(광해군 2년)까지 여러 차례 <광해군일기>에 나온다. 그 대목은 대부분 명나라 사신들이 나라 안에 와 있을 때의 것들이다. 세자 책봉 때부터 왕위 계승에 이르기까지 명나라의 오만한 간섭에 신물이 난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나라의 속사정을 시시콜콜 드러내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감추어야 할 일은 조보에 내지 말라"는 내용이 나오는 <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28일 기사.


 


 


<광해>가 설정한 ‘가짜 광해군 이야기’의 개연성을 인정해줄 수 있는 레퍼런스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1608년의 기사 한 줄을 내세워 마치 거기에 무언가 개연성이 있는 것처럼 포장한 것도 되레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런 포장은 전혀 솔직한 태도가 아니며, 독자와 관객을 우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왕의 남자>보다도 개연성이 훨씬 더 떨어진다.


 


허상이 빚은 감동의 무상함


 


개연성을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설정이다 보니, 영화 전체가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판타지가 되고 말았다. 그 설정에 따르면 광해군 때에 이루어진 대동법 실시나 명나라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가짜 광해군의 입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게 된다. 그러면 광해군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건 광해군을 세 번, 네 번 죽이는 거다.


광해군은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에게 짓밟혀 죽었다. 죽은 뒤에도 그의 치적은 사관들의 검열과 곡필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 당했고, 개혁 군주로서 그의 존재는 완전히 말살 당했다. 그가 죽은 지 389년이 지나 만들어진 영화에서는, 서인들의 왜곡된 기록에서도 말살할 수 없었던 대동법 추진과 중립외교 노선 등 그의 치적조차 평민 출신 가짜 왕의 일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나는 지금 광해군의 발등에 서서 영화를 보고 있다. 사람들이 아무리 이 영화를 보며 평민 대통령 노무현을 연상하고, 평민의 정치의식을 기른다 해도, 그건 역사 허무주의를 감당할 수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의 결말이 정치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았다면 되레 더 이상했을 것이다. 허상으로 만든 감동은 허무주의로 귀결한다.


 



 


광해군의 진짜 고민이 궁금하다


 


내가 진정 아쉬워하는 건,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치밀한 탐구의 빈곤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평민이 운 좋게 왕 자리에 앉아 일갈을 하면 대동법도 실행할 수 있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그런 판타지 같은 세상이 아니다. 허균이 가짜 광해군 하선에게 “왕을 만들어주겠다”며 킹메이커 구실을 자임하는 대목은,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겐 구토 유발 장면 일위였다.


 


내가 진정 아쉬워하는 건, 진짜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그다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세태이다.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은 권문세가들, 그들 사이의 알력과 권력투쟁, 국제사회에서 신흥세력으로 위협해오는 건주 여진의 후금, 전통적인 강대국 명나라의 강력한 압력, 그 숨이 막힐 듯한 폭압과 권모와 모략의 틈바구니에서, 나라의 모든 책임을 한 몸에 지고 있는 군주는 도대체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떻게 자기 활로를 뚫어갔는가. 광해군은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한 사람인가. 어떤 인간인가. 그 압도적인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뎌냈는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가. 누구와 어떤 울분을 나눴는가. 나는 광해군의 진짜 고민이 궁금하다. 이런 탐구가 담긴 작품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인간과 집단과 사회와 정치와 권력에 관한 훨씬 풍부한 영감과 통찰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도깨비보다 똥개 그리는 게 더 어렵다


 


<한비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왕의 문객 가운데 왕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제나라 왕이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그리는 게 가장 어렵소?” 하고 물었다.


화가는 말하기를 “개를 그리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무엇을 그리는 게 가장 쉬운가?”


화가가 대답했다. “귀신을 그리는 게 가장 쉽습니다. 대저 개나 말은 사람들이 다 아는 것으로, 아침저녁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완전히 똑같게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형체가 없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기가 쉽습니다.”


 


나는 <광해>를 보면서 한비자의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깨비 그리기는 쉽다. 그러나 똥개 한 마리조차 도깨비보다는 그리기 어렵다.


 


지금도 누군가가 <조선왕조실록> 같은 자료를 검색하면서 <왕의 남자>나 <광해> 같은 ‘팩션’을 만들어낼 거리를 뒤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영화는 앞으로도 꼬리를 물고 나올 것이다. 트렌드이고 유행이고 패션인데 어쩌겠는가. 천만 관객이 또 들고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도 매우 좋은 일이다.


나는 그렇게 역사를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것도 물론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탐구를 하는 이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진짜 싸움은 도깨비를 그리는 나른한 판타지에서 벌어지지 않고, 늘 리얼 똥개를 그리는 엄혹한 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201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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