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나는대로 읽은 책

눈초공식계정
- 작성일
- 2010.5.26
촛불의 미학
- 글쓴이
- 가스통 바슐라르 저
문예출판사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하고 읽게 된 책입니다. 책의 안쪽 표지에서 “83.4.2. 토요일 저녁, 낮선 서점에서”라고 적은 아내의 단정한 글씨를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결혼하면서 아내가 가져온 책인데, 지금에야 눈에 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1983년 중판된 책이고 2001년에 다시 출판한 것은 촛불집회의 영향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렇게 바란 책갈피와 좌우가 아니라 상하로 되어 있는 편집이 읽기에 불편한 느낌이 듭니다만, 제목이 주는 강렬한 느낌으로 상쇄하게 됩니다.
번역하신 이가림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는 <시인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상가로 평가되는 가스똥 바슐라르입니다. 물리학과 화학을 강의하면서 철학사 학위를 취득하여 철학교수 자격을 취득하여 소르본느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한 그는 <불의 정신분석>, <물의 꿈>, <공기의 꿈> 등의 저술을 통하여 그의 철학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촛불』은 언뜻 보기에는 모든 지식의 요소를 벗겨버린, 즉 엄격하게 정돈된 과학인식론의 철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시적 몽상의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내밀성의 배후에는 저 놀라운 과학 철학자, 물리학자, 사상가로서의 바슐라르의 모습이 숨어 있는 것이다. 과학의 결합을 시로 메꾸고 시의 결함을 과학으로 메꾸어야 한다고 말한 그의 탐구의 전 무게가 걸려 있는 이 간결한 몽상의 책 『촛불』도 시와 과학의 접점에 놓여 있는 바슐라르적 바탕 위에서 볼 때 비로서 <항상 살아 있는 뜻>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은 이가림교수의 해설은 촛불에 대한 바슐라르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촛불을 켜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만, 어렸을 때만해도 전기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탓에 촛불을 켜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있던 전등이 깜박이다가 꺼지면 순식간에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이기 마련입니다. 준비해두었던 초의 심지에 성냥을 당겨 불씨를 옮기면 어둠이 조금 물러나게 됩니다. 어둠을 겨우 물리치고 있는 촛불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에 불꽃을 지켜보던 생각이 납니다.
촛불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생각이 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생각거리를 끄집어내어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불꽃은 우리들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 불꽃 앞에서 꿈꿀 때, 사람이 상상한 것에 견주어 본다면 사람이 인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꽃은 그 은유와 이마쥬의 가치를 매우 다양한 명상의 영역 안에 두고 있다. 어느 것이라도 삶을 나타내는 동사의 주어로서 불꽃을 취해보라. 촛불은 그 동사에 한층 생기를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는 바슐라르의 말대로 촛불은 꿈을 꾸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촛불은 몽상가를 만드는 탁월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촛불은 방안에 고즈넉하게 켜있을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촛불이 방에서 나와 밖으로 나서게 되면 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은 촛불의 커다란 적입니다. 풍전등화라는 말은 위기상황을 제대로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연인들이 촛불을 밝혀 사랑을 뜨겁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촛불을 혼자서 지켜보면서 스스로의 마음 안에서 무엇인가를 일구는 행위 또한 의미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합치는 행위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바슐라르는 “18세기 말엽 어떤 불꽃의 물리학자는 두 개의 촛불의 불꽃을 합치시키려고 헛되어 시도했었다. 그는 심지에 심지를 맞대어 촛불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고독한 불꽃은 다만 더 커지고 상승하는 일에만 취하여 합일되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각각 그 Qy족함의 미묘함을 그 꼭대기에 지키면서 수직성의 에네르기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 물리학자의 실험 속에서 볼 수 있는 서로 힘을 합쳐 불태우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두 개의 정열적인 마음은 얼마나 불행한 상징인가! 적어도 불꽃은 몽상가에 있어서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존재의 상징인 것이다! 불꽃은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생성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가림교수는 이런 부분을 “일반적으로 불이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속으로 애태우면서 절망과 체념을 되씹는 남녀의 마음이나 짝사랑의 그리움은 혼자 조용히 타는 촛불의 이마쥬에 다름아닌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2008년 100회나 이어져온 집회에서 중요한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등장한 촛불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과장된 과학적 사실로 인하여 만들어진 허상을, 촛불을 지켜보면서 키운 몽상을 누군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촛불을 켜들고 광장으로 모여든 것은 아니었던가? 5월 2일 촛불집회를 처음 제안한 것은 어느 고등학생이었고, 그 모임에는 여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왜곡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정보제공으로 지나치게 부풀려진 공포를 해결하기 위하여 거리로 모인 그들은 해답을 구했을까요? 촛불은 방안에서 고요하게 타오를 때 그 최고의 가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바람을 맞게 된 촛불은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처음 순수한 뜻에서 시작된 촛불문화제를 들불로 만들고자 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슐라르가 분류하는 세 가지 형태의 불 가운데 자연의 불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불이 제대로 타는 것을 말하는데, 불이 계속해서 강렬하게 타기 위해서는 꾸준한 연료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연에 반하는 불>은 자기에게 맞붙으려고 하는 것을 태워서 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합니다. 가령 라신느(Racine)의 경우에 있어서 작중 인물들이 보여주는 지나친 정열은 이러한 불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와 남을 태워 버리려는 이 불은 대개 타인을 위하기보다는 해치기 쉬운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촛불문화제를 마친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는 광경은 거대한 불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미 촛불이 아니라 들불이 된 것입니다. 자기와 남을 태우고 말게 될 운명을 타고난 들불은 결국은 과격한 시위로 변모되어 처음 촛불을 손에 든 가냘픈 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바슐라르는 “불꽃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생성을 향해 긴장되어 있는 세계이다. 몽상가는 거기에서 그 자신의 존재와 그 자신의 생성을 보는 것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불의 생성은 모든 생성 가운데 가장 극적이며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불에서 그것을 상상한다면 세계의 걸음은 빠르다. 그리하여 철학자가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는 모든 것을-폭력이나 평화까지도-꿈꿀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고,
이가림교수의 해설에서는 “촛불은 그 자체의 모습만을 놓고 관찰해 보면, 불꽃이 붉은빛과 흰빛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흰빛은 뿌리 쪽의 파란빛과 연결되어 있는 사회의 부패와 권력을 일소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붉은빛은 심지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불순물과 더러움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두 개의 투쟁이 하나의 변증법을 이루면서 탄다. 즉 촛불은 흰빛의 상승과 붉은빛의 하강, 가치와 반가치가 싸우는 결투장인 것이다.”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촛불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딪힘은 촛불을 지켜보는 몽상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사고의 부딪힘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회적 이슈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서의 촛불은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촛불이 가져온 다양한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바슐라르 역시 이런 점을 예견하였던지 이 책의 서론에서 “세계는 급속도로 진보하고, 시대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제 희미한 빛이나 타다 남은 촛불의 시대는 지났다. 쓰이게 되지 않게 된 사물에 집착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꿈일 뿐이다.… 전등은, 기름으로 빛을 내는 저 살아있는 램프의 몽상을 우리들에게 결코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관리를 받는 빛의 시대에 들어왔다. 우리들의 유일한 역할은 전등의 스위치를 돌리는 일뿐이다. 우리들은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인 주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정당한 긍지를 가지고 점화한다는 동사의 주어가 되기 위하여 그 행위를 이롭게 할 수 없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촛불이 거리로 나섰을 때의 느낌은 바슈라르가 인용하고 있는 스트린드베리의 <지옥>에서의 한귀절 “독서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촛불을 켠다. 불길한 침묵이 지배하고, 나는 심장의 고동이 뛰는 것을 듣는다. 그때 조그맣고 메마른 소리가 전기의 불꽃처럼 나에게 충격을 준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초의 스테아린의 큰 덩어리가 막 떨어진 것이다. 오직 그것뿐,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죽음의 흉조인 것이다.”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이제는 촛불을 껴들었을 때를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촛불을 켜 든 사람들은 촛불이 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바슐라르를 마지막으로 인용하겠습니다. “촛불의 몽상가의 마음에 <꺼진다>란 말은 어떤 울림을 갖는 것일까! 말은 아마도 그 어원을 저버리고 낯선 생명, 단순한 비교의 우연에서 빌린 생명을 다시 붙잡는 것이다. <꺼진다>라는 동사의 가장 큰 주어는 무엇일까? 생명일까, 아니면 촛불일까? 은유성을 갖는 동사는 어떠한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주어라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꺼진다>라는 동사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소리, 노여움과 마찬가지로 사랑 등 무엇이든지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참다운 뜻, 원초적인 뜻을 바라는 자는 촛불의 죽음을 상기할 것이다. 꺼지는 촛불은 죽어가는 태양이다. 촛불은 하늘의 별보다도 더 천천히 죽는다. 심지가 구부러지고, 심지가 까맣게 된다. 불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기의 아편을 먹는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 말 없이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는다.”
촛불은 찬반을 논하기 위해서 쳐들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도구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나를 창조해내기에 더 적합한 도구입니다. 바슐라르가 이 시대를 살고 있어, 서울 광화문에서 100일 동안 이어졌 있는 촛불을 보았다면 새로 쓰게될 <촛불의 미학>에서는 이를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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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