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유로운 서가

여유로움
- 작성일
- 2014.6.8
조선 임금 잔혹사
- 글쓴이
- 조민기 저
책비
재작년 개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저잣거리의 만담꾼인 하선은, 왕인 광해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왕의 대역을 하게 된다. 제왕학에 대해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했던 하선은 인간적인 면모만으로 왕의 역할을 하고, 그런 따뜻함에 끌려 도승지 허균은 하선에게 '원하신다면 왕으로 만들어드리겠다'는 제안을 한다. 절대군주제를 택한 조선에서 왕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왕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한 태종에서 시작해서 여러 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왕들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 선왕의 적자로 태어나 왕위를 정상적으로 계승했더라도, 실정으로 또는 찬탈로 왕위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있었다. 아들도 경쟁자가 되고, 아내도 지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왕이라는 것은 상당히 고독하고 힘든 자리다.
<조선 임금 잔혹사> (2014, 조민기 지음, 책비 펴냄)는 그런 조선 시대의 왕들을 '왕으로 선택된 남자',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왕으로 태어난 남자', '왕이 되지 못한 남자'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세 사람씩 소개한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저자는 카피라이터, 칼럼니스트로서 대중문화와 고전문학, 인문역사에 대해 강연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는 소개가 책 표지에 나와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왕으로 선택된 남자'에는 왕의 적장자가 아니었는데도 왕이 된 세종, 성종, 중종이 소개된다. 세종은 훈민정음 및 집현전과 연계해서 위인전에 항상 등장하는 분이고, 성종은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이후 연산군에 엮여 많이 들어보았는데,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에 의해 왕이 된 것 정도만 알았을 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율곡이 동방4현으로 꼽아 존경한 김굉필, 이언적, 정여창, 조광조 중 조광조를 발탁하고 중용하다가 내친 사람이 바로 중종이었다. 저자는 세종, 성종, 중종의 인간적인 삶과 사람을 정치와 연계해서 흥미롭게 풀어낸다.
제2부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편에는 선조, 광해군, 인조가 나온다. 임진왜란 전에는 당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잘 끌고 가는 듯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실정을 거듭한 선조, 그런 선조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기까지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왕위에 올라서는 대동법과 호패법, 실리 외교 등 나라를 위한 정치를 했으나 결국 당쟁에 희생된 광해군,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꺾었지만 온갖 내란과 전쟁과 의심으로 최악의 정치를 펼친 인조. 이들의 삶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과 맞물려 더 큰 어려움을 겪었으니, 왕위의 무거움을 알 수 있다.
제3부 '왕으로 태어난 남자'에서는 연산군과 숙종, 정조가 소개된다. 사극과 영화, 소설 등에서 많이 만나본 이들이어서 익숙하다. 어머니를 잃은 상처로 폭군이 된 연산군과 달리,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진 정조는 아버지의 지위를 승격하고 초인적인 노력으로 나라를 개혁한다.
마지막 '왕이 되지 못한 남자'에서는 인조의 아들로서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소현세자, 뒤주 속에서 사망한 사도세자, 순조의 장남이고 헌종의 아버지로서 대리청정 3년 만에 과로로 사망한 효명세자의 이야기이다.
왕의 이야기는 절대 개인의 이야기일 수가 없다. 그의 한마디에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고, 나라가 나아갈 방향, 크게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 왕의 가족, 왕을 둘러싼 신하들의 목소리도 크지만, 왕에게 집중된 힘이 너무나도 크기에, 우리는 왕조 시대에서 왕의 일생을 통해 나라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과장되고 왜곡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왕들의 삶을 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왕으로 선택된, 왕이 되고 싶었던, 왕으로 태어난, 왕이 되지 못한 남자들의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삶을 보면서, 이제는 왕이라는 절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새삼 한다. 며칠 전 있었던 선거와 같은 절차를 통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가. 제목 그대로 '조선 임금의 잔혹한 역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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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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