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사진
언강이숨트는새벽
  1. 기본 카테고리

이미지

도서명 표기
쟁점 한국사 전근대편
글쓴이
한명기,이기훈,박태균,송호정,강종훈,임기환,채응석,안병우,도현철,이정철 등저
창비
평균
별점8.1 (19)
언강이숨트는새벽

쟁점한국사 ㅡ 한명기 외 , 전근대편 ㅡ


[공부한당 :2 -1 ]운명을 달리한 고구려와 신라에 이어

4장 문벌 사회의 빛과 그림자 ㅡ 채웅석

흔히 고려는 초기 호족의 시대에 이어 11세기 무렵부터 문벌귀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 여기에 따르면 회유와 포섭으로 지방 호족들을 통합한 초기에는 고려가 왕과 호족이 호혜적 관계를 이루는 호족 연합 정권의 형태를 보였다 .
이 같은 관점에서는 정치 세력을 파악함에 있어 출신 기반 , 특히 혈연을 강조한다 . 이에 대해 혈연적 귀속성만 강조하면 골품귀족제를 무너뜨린 신라 말 고려 초 사회 변화의 의미가 퇴색되고 , 출신 기반만 강조하면 정치 이념이나 정치 운영론을 간과해 이해의 폭이 좁아진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 고려 초기 왕과 호족이 연합 정권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는가 ? ' ' 문벌귀족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고려에 귀족제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과연 있었는가 ? ' ' 왕과 문신의 대립과 문무 차별이 무신정변의 결정적 원인이었는가 ' 등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

한편 고려의 문화는 귀족문화나 조선의 사대부 문화에 비해 그 특성을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본관제 , 유학 - 불교 - 도교 - 풍수지리설 등의 공존 , 문 - 무반의 분화 , 농 - 공 - 상 등 사회적 분업의 법제화 등에서 볼 수있듯 ,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고려의 시대적 특징이었다 . 그런 다양성을 바탕으로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역동성까지 지니게 됐다 . 이러한 특징은 다원적 가치를 중시하는 오늘날 , 우리 역사에서 되새겨보아야 할 또 하나의 전통이 아닐까 .


신라 말의 혼란과 지방 세력의 성장

신라 지배 체제의 근간으로 작용했던 골품제가 말기에 한계를 드러냈다 . 골품제의 바탕이 되는 친족 집단이 약화되고 개인을 기준으로 한 친속 관계가 발달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화했다 .
ㅡ 본문 100 쪽 ㅡ

지방에서는 농민층이 몰락하는 한편 지방 세력이 성장하는 양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원래 신라의 지배 체제는 골품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지방민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 조세는 물론 식읍과 녹읍 , 전장 지배 등을 통해 수취한 지방의 재물들이 모두 왕경으로 옮겨졌다 . 이로써 왕경의 귀족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

그런 가운데 지방에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운 호부층이 나타났다 . 그들은 농민층의 분화를 이용해 토지와 예속 노동력을 늘렸다 . 호부층 중에는 촌주 출신의 토착 세력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또는 낙향한 귀족들이 많았다 . 촌주는 골품제 때문에 정치적 성장에 제약이 있었고 , 낙향한 귀족은 중앙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
ㅡ본문 101 쪽 ㅡ

그런 상황에서 호부층은 큰 불사를 일으켜 지역민들의 신망을 얻고 리더십을 키울 수 있었다 . 그 과정에서 중앙으로 빠져나가던 경제력이 지방에 유보되고 , 골품제 중심의 세습 신분제가 해체되었으며 , 지방의 정치력과 문화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
ㅡ본문 102 쪽 ㅡ

* 쟁점의 한가운데 이자겸의 난 , 묘청의 난 , 무신정변등이 있다 . 무신정변을 이르는 말엔 마침내가 따라 붙는 걸 본다 . 일어날 사단이었다고 여겨지는 문장 . 한계를 긋고 볼 수밖에 없는 과거라는 형태의 역사 . 세습된 정치세력들의 와해와 새로운 세력으로 호부층 , 그들이 만들어 내는 권력의 지방 이동을 엿보게 된다 .

고대에서 중세로 , 새 시대를 구축하다

할거하던 지방 세력들이 후삼국으로 통합되고 이를 다시 고려가 통일했다 . 태조 왕건은 송악의 지방 세력 출신으로 궁예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시중을 지내는 등 관력을 쌓다가 정변을 일으켜 고려왕조를 개창했다 . 왕건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궁예를 거울삼아 유화적인 자세로 지방 세력을 대하고 , 자기 편이 된 세력에는 근거지를 인정해주었다 . 왕건의 포섭 정책은 꽤 성공적이어서 지방 세력은 물론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받고 이어 후백제까지 격파하여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

중앙 정치제도상으로 왕권을 뒷받침하는 내봉성 , 병부와 함께 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광평성 , 순군부 등의 관부가 병존했다는 주장이다 .
고려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면서 지방 세력의 힘은 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새로운 지배 체계를 마련하는 한편 왕권에 제약이 되는 공신 세력과 분권적인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
ㅡ본문 104 쪽

정치적으로는 광종 때에 왕권이 크게 강화됐다 . 광종은 관료들의 공복을 제정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해 문 - 무반이 구분된 관료제를 발전시켰으며 , 노비안검법을 시행해 공신과 지방 세력의 힘을 누르는 한편 강력한 숙청을 실시했다 . 그런 바탕에서 성종은 중앙 정치기구를 당의 3성 6부제에 따라 개편하고 12 목을 중심으로 지방관을 파견했으며 , 관반 조직을 향리직제로 개편하는 등 지배 체제를 대폭 정비했다 . 또 국자감과 태묘를 설립해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에 힘썼다 .
사회적으로는 신라 하대 이래 지방의 상황이 크게 변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영역 관계와 내부의 계층 관계 등을 감안해 새로운 지배 질서를 세워야 했다 . 그에 따라 고쳐 초기부터 각 지역의 호구와 토지를 파악해 장적을 올리고 본관 제도를 시행했다 . 본관 제도가 전국적 차원에서 정비된 시기는 성종 때였다 . 본관에 따라 주민의 신분이 달랐는데 특히 향 - 소 - 부곡 등이 본관인 사람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 고려는 본관 사이에 차등을 둔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의 이주를 막았다 . 관직임용이나 국가 정책에 따른 이주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해야 했다 .
ㅡ본문 105 쪽 ㅡ

* 출신을 볼 수있는 본관제는 그 뿌리가 깊었구나 하는 걸 배운다 . 지금은 개인의 신분을 알기 위한 형태로 아버지의 본관 , 본적을 확인하던 것도 개개인적인 형태로 변화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

지금의 가족부를 떠올리는 게 맞는 걸까 ? 그게 같은 형태의 본관제에서 변질된 것인지 하는 의문 . 차별을 두던 향 - 소 - 부곡 은 어째서 차등을 두는 곳에서도 특별히 거론되는가 하는 의문 , 그때의 향 -소 - 부곡은 지금의 어디쯤이 되는 걸까 ? 그것이 지방을 일컸는 단어인지 , 계급을 일컸는 단어인지 , 하는 궁금증 . 검색을 해보니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이 향 - 소 -부곡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 그것이 군 , 현을 경계로 하는 지역인지 , 그런 이들을 모아 둔 경계의 한 곳인지 말들이 많았다 . 이 책은 그나마 가장 최근의 것이니만큼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60142&cid=47322&categoryId=47322
고려 초와 신라 때를 같이 넘나들기에 이 책의 부분에선 집중이 조금 필요하다 . 고려를 이해하는가 싶으면 신라가 같이 의문부호를 안고 딸려 오는 것과 같아서 ... 그물에 엮인 듯 헤집어진다 . 한 줄기로만 이해가 되지 않는 형태 . 어쩌면 그런 것들의 모두가 역사인걸까 ?

고려의 지배층은 귀족인가 , 관료인가

고려가 국내외적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11세기 무렵부터 중앙 지배층이 문벌화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 이때도 물론 신진 관료들이 등용되었으나 문벌화에 따라 계층 이동이 상대적으로 주춤해졌다 . 고려는 능력 본위의 관료 임용과 승진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교육과 음서 등을 문벌에 유리하게 운영했다 . 이에 따라 고려 전기 중앙 지배층의 성격에서 귀속적인 요소와 성취적인 요소가 함께 나타났다 .
ㅡ본문 107 쪽 ㅡ

귀족제를 뒷받침하는 요소로 가장 강조하는 제도는 음서이다 . 음서는 자손이 조상의 음덕에 따라 관직을 가질 수 있도록 특혜를 주는 제도를 말한다 . 문벌귀족제론에서는 5품 이상 관료의 자손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시행한 음서가 있었고 , 대상자들은 대게 15세 즈음 그 제도를 이용하여 일찍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 한편 교육제도가 계층별로 차별적이었고 , 과거에서도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사람에게 특혜를 주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 과거제도도 문벌과 무관하게 시행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
ㅡ본문 108 쪽 ㅡ

초기부터 양천제를 기본으로 했던 고려의 신분제를 생각해보면 문벌귀족제론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 양천제는 원리적으로 천인만 배제하고 양인 내에서 권리와 의무상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제도이다 . 신라에서도 양인과 천인을 구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골품제가 강고해 한계가 있었다 . 그에 비해 고려에서는 지배층이라고 하더라도 신분의 생득적인 계승을 보장하지 않았다 . 그런 점에서는 조선도 고려와 다를 바 없었다 .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문벌의 존속 시기가 길지 않았고 , 과거의 비중이 커진 대신 음서의 비중이 낮았다 .
ㅡ 본문 110 쪽 ㅡ

물론 고려가 교육이나 관리 임용 제도등에서 지배층을 우대하고 조선에 비해 혈연적 배경을 중시한 것도 사실이다 . 그런 맥락에서 신라 말 고려 초와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 변화를 고려한다면 고려를 신라 , 조선과 구분하여 문벌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
ㅡ본문 111 쪽 ㅡ


고려 사회를 이끈 힘

신라의 세습귀족제가 해체되고 지방 사회의 정치 - 문화적 역량이 상승하던 시기에 , 동아시아의 국제 상황도 크게 변화했다 . 중국에서는 오대십국의 분열을 거쳐 송이 등장했다 . 송은 경제나 문화 면에서 강국이었다 . 하지만 북방의 거란이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고려와 송을 압박했다 . 고려는 거란과의 대결 끝에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 송과는 공식 외교가 끊긴 상태에서도 경제 - 문화적 교류를 유지했다 .
ㅡ본문 111 쪽 ㅡ

신분제도를 보면 고려는 양천제를 시행하여 양인 배부에서 사 士 와 서 庶 를 구분하고 , 사 내부에서는 문반과 무반을 구분했으며 , 서인 내부에서 농- 공 - 상의 사회적 분업에 따른 계층 질서를 편성했다 . 공 - 상에 대한 차별은 그 직업을 낮잡아 보는 데서 출발했다기보다 전업 專業 유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만들어졌다 . 본관에 따라서도 계층적 위상이 달랐다 . 향 - 소 - 부곡 등이 본관인 사람은 양인 신분이면서도 차별을 받았다 . 그들은 잡척이라고 불리면서 국학 입학과 과거 응시가 금지되고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 그들이 다른 본관의 배우자와 자식을 낳아도 차별은 대물림됐다 . 본관에 따른 차별은 노비에게 적용되는 것과 유사한 원칙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 공로나 범죄에 대한 상벌로 특정인의 본관을 향- 소 - 부곡에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거나 일반 군현에서 향 - 소 - 부곡으로 강등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
ㅡ본문 114 쪽 ㅡ

고려에서는 다양한 층위나 요소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역동성이 커졌다 . 고려시대에 호족 ㅡ 문벌 ㅡ 무신 ㅡ 권문세족 ㅡ 신흥 사대부로 이어진 정치 주도층의 변화는 그런 역동성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 지배층의 잦은 교체는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라기보다 특정 신분이나 이념이 독점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 귀족제적 요소와 관료제적 요소의 정치적 길항 관계 속에서 역동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
ㅡ본문 117 쪽 ㅡ


무신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반적으로 무신정변은 무신에 대한 차별과 의종의 실정에 반발하여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 일각에서는 무신 차별이 정변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부터 무신이 양반 귀족의 일원으로소 내란과 외침에 대응해 꾸준히 지위를 상승시켰던 점을 고려하면 , 무신정변을 무신들의 현실적 세력 성장이 전통적인 억무정책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사거능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여기서는 여진정벌 , 이자겸의 남 , 묘청의 난 등을 거치면서 군이 여러차례 동원되고 무신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 주목했다 .
ㅡ본문 118 쪽 ㅡ

무신정변과 이후 약 100년 간의 무신 집권이 단순히 문- 무반 사이의 차별로 야기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 또 이 시기에 정변이 이어지고 농민 항쟁이 폭발했다고 해서 이때를 순전히 퇴행적인 시기였다고만 볼 수는 없다 . 무신집권기 역시 고려 건국 이후의 역사 흐름 속에서 문벌 사회가 고착되는 것을 막는 등 나름의 발전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
.
무신정변과 무신집권기에 이어진 정변 등이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지만 이로써 신진 관료들이 성장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도 권력을 잡는 기회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문반과 무반 사이의 소통의 길이 열렸다 .
ㅡ 본문 123 쪽 ㅡ


* 견해가 갈리는 지점인 음서와 문벌 , 과거와 문벌 등이 있다 . 과거가 음서를 넘어 능력을 발굴하는 제도로 역할을 다했는가 , 아닌가 하는 부분이 견해가 달리하는 관점의 대상 같다 . 그러니까 과거도 음서도 , 일부 층에게만 누릴 수 있던 또 하나의 신분제도가 아닌가 싶다 . 과거를 아예 볼 수도 없는 천민이 있는 것이다 . 어쩌면 그 신분들이 향 - 소 - 부곡 같은 차별로 노동력을 바치는 이들을 테두리 안에 가둔 채 자기들끼리만 관료직도 정치 입문도 능력을 키우는 일도 다 해 먹었던 세상 아닌가 ㅡ 하는 것 . 그러나 반대로 요즘의 모든 국민들은 종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가 제사로 조상의 음덕을 기린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경제력의 확산으로 보는게 좋을까 ? 조상을 기리는 일은 음덕을 바라는 모두에게 확대된 걸까 ? 아니면 신앙같은 것이 제사라는 형태로 자리 잡은 걸까 . 우리를 옛날의 사람들로 시대를 바꿔보면 우린 어떤 면에서 관직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게 재미있었다 . 단지 유치한 상상일 뿐이지만 ,

 
사상 , 경제 , 조직 등을 살펴본다 . 다원성이란 말이 자주 보이기도 하는데 , 이를 쓴 저자의 관점에서 본 해석인지 , 일반론 적인 견해인지 사실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 개인의 해석이라고 볼 수있는 부분은 마치 번역서를 한번 다시 번역한 듯이 ~ 보인다 . 정도로만 언급이 되기에 이런 부분이 과연 쟁점거리로 재정립 될 수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 그냥 한번 내 스타일로 과거를 읽어봤어 ... 하는 느낌 . 책임 없는(?) 무게랄까 .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해석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 고루한 족보를 고루한 양반이 읽는 것처럼 . 그래서야 양반 족보 읽기 밖에 더 될까 ㅡ 싶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역사를 좀 들여다 보고 말하면 어떨까 , 하는 생각까지 든다 . 어쩌면 전무후무한 백지 상태의 인간이 보는 시대는 오직 왜 ? 왜 , 때문에 , 따위의 호기심 천국이 될까 ?

세번째 공부한당[ 2ㅡ1] 챕터를 올려본다 .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3.04.26

댓글 0

빈 데이터 이미지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36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120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7.1
    좋아요
    댓글
    224
    작성일
    2025.7.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