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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강이숨트는새벽
- 작성일
- 2017.3.24
쟁점 한국사 전근대편
- 글쓴이
- 한명기,이기훈,박태균,송호정,강종훈,임기환,채응석,안병우,도현철,이정철 등저
창비
쟁점한국사 ㅡ 한명기 외 , 전근대편 ㅡ
[공부한당 :2 -1 ]운명을 달리한 고구려와 신라에 이어
4장 문벌 사회의 빛과 그림자 ㅡ 채웅석
흔히 고려는 초기 호족의 시대에 이어 11세기 무렵부터 문벌귀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 여기에 따르면 회유와 포섭으로 지방 호족들을 통합한 초기에는 고려가 왕과 호족이 호혜적 관계를 이루는 호족 연합 정권의 형태를 보였다 .
이 같은 관점에서는 정치 세력을 파악함에 있어 출신 기반 , 특히 혈연을 강조한다 . 이에 대해 혈연적 귀속성만 강조하면 골품귀족제를 무너뜨린 신라 말 고려 초 사회 변화의 의미가 퇴색되고 , 출신 기반만 강조하면 정치 이념이나 정치 운영론을 간과해 이해의 폭이 좁아진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 고려 초기 왕과 호족이 연합 정권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는가 ? ' ' 문벌귀족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고려에 귀족제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과연 있었는가 ? ' ' 왕과 문신의 대립과 문무 차별이 무신정변의 결정적 원인이었는가 ' 등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
한편 고려의 문화는 귀족문화나 조선의 사대부 문화에 비해 그 특성을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 지역 사회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본관제 , 유학 - 불교 - 도교 - 풍수지리설 등의 공존 , 문 - 무반의 분화 , 농 - 공 - 상 등 사회적 분업의 법제화 등에서 볼 수있듯 ,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고려의 시대적 특징이었다 . 그런 다양성을 바탕으로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역동성까지 지니게 됐다 . 이러한 특징은 다원적 가치를 중시하는 오늘날 , 우리 역사에서 되새겨보아야 할 또 하나의 전통이 아닐까 .
신라 말의 혼란과 지방 세력의 성장
신라 지배 체제의 근간으로 작용했던 골품제가 말기에 한계를 드러냈다 . 골품제의 바탕이 되는 친족 집단이 약화되고 개인을 기준으로 한 친속 관계가 발달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화했다 .
ㅡ 본문 100 쪽 ㅡ
지방에서는 농민층이 몰락하는 한편 지방 세력이 성장하는 양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원래 신라의 지배 체제는 골품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지방민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 조세는 물론 식읍과 녹읍 , 전장 지배 등을 통해 수취한 지방의 재물들이 모두 왕경으로 옮겨졌다 . 이로써 왕경의 귀족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
그런 가운데 지방에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운 호부층이 나타났다 . 그들은 농민층의 분화를 이용해 토지와 예속 노동력을 늘렸다 . 호부층 중에는 촌주 출신의 토착 세력이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또는 낙향한 귀족들이 많았다 . 촌주는 골품제 때문에 정치적 성장에 제약이 있었고 , 낙향한 귀족은 중앙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
ㅡ본문 101 쪽 ㅡ
그런 상황에서 호부층은 큰 불사를 일으켜 지역민들의 신망을 얻고 리더십을 키울 수 있었다 . 그 과정에서 중앙으로 빠져나가던 경제력이 지방에 유보되고 , 골품제 중심의 세습 신분제가 해체되었으며 , 지방의 정치력과 문화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
ㅡ본문 102 쪽 ㅡ
* 쟁점의 한가운데 이자겸의 난 , 묘청의 난 , 무신정변등이 있다 . 무신정변을 이르는 말엔 마침내가 따라 붙는 걸 본다 . 일어날 사단이었다고 여겨지는 문장 . 한계를 긋고 볼 수밖에 없는 과거라는 형태의 역사 . 세습된 정치세력들의 와해와 새로운 세력으로 호부층 , 그들이 만들어 내는 권력의 지방 이동을 엿보게 된다 .
고대에서 중세로 , 새 시대를 구축하다
할거하던 지방 세력들이 후삼국으로 통합되고 이를 다시 고려가 통일했다 . 태조 왕건은 송악의 지방 세력 출신으로 궁예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시중을 지내는 등 관력을 쌓다가 정변을 일으켜 고려왕조를 개창했다 . 왕건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다가 실패한 궁예를 거울삼아 유화적인 자세로 지방 세력을 대하고 , 자기 편이 된 세력에는 근거지를 인정해주었다 . 왕건의 포섭 정책은 꽤 성공적이어서 지방 세력은 물론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받고 이어 후백제까지 격파하여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
중앙 정치제도상으로 왕권을 뒷받침하는 내봉성 , 병부와 함께 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광평성 , 순군부 등의 관부가 병존했다는 주장이다 .
고려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면서 지방 세력의 힘은 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새로운 지배 체계를 마련하는 한편 왕권에 제약이 되는 공신 세력과 분권적인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
ㅡ본문 104 쪽
정치적으로는 광종 때에 왕권이 크게 강화됐다 . 광종은 관료들의 공복을 제정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해 문 - 무반이 구분된 관료제를 발전시켰으며 , 노비안검법을 시행해 공신과 지방 세력의 힘을 누르는 한편 강력한 숙청을 실시했다 . 그런 바탕에서 성종은 중앙 정치기구를 당의 3성 6부제에 따라 개편하고 12 목을 중심으로 지방관을 파견했으며 , 관반 조직을 향리직제로 개편하는 등 지배 체제를 대폭 정비했다 . 또 국자감과 태묘를 설립해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에 힘썼다 .
사회적으로는 신라 하대 이래 지방의 상황이 크게 변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영역 관계와 내부의 계층 관계 등을 감안해 새로운 지배 질서를 세워야 했다 . 그에 따라 고쳐 초기부터 각 지역의 호구와 토지를 파악해 장적을 올리고 본관 제도를 시행했다 . 본관 제도가 전국적 차원에서 정비된 시기는 성종 때였다 . 본관에 따라 주민의 신분이 달랐는데 특히 향 - 소 - 부곡 등이 본관인 사람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 고려는 본관 사이에 차등을 둔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의 이주를 막았다 . 관직임용이나 국가 정책에 따른 이주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해야 했다 .
ㅡ본문 105 쪽 ㅡ
* 출신을 볼 수있는 본관제는 그 뿌리가 깊었구나 하는 걸 배운다 . 지금은 개인의 신분을 알기 위한 형태로 아버지의 본관 , 본적을 확인하던 것도 개개인적인 형태로 변화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
지금의 가족부를 떠올리는 게 맞는 걸까 ? 그게 같은 형태의 본관제에서 변질된 것인지 하는 의문 . 차별을 두던 향 - 소 - 부곡 은 어째서 차등을 두는 곳에서도 특별히 거론되는가 하는 의문 , 그때의 향 -소 - 부곡은 지금의 어디쯤이 되는 걸까 ? 그것이 지방을 일컸는 단어인지 , 계급을 일컸는 단어인지 , 하는 궁금증 . 검색을 해보니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이 향 - 소 -부곡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 그것이 군 , 현을 경계로 하는 지역인지 , 그런 이들을 모아 둔 경계의 한 곳인지 말들이 많았다 . 이 책은 그나마 가장 최근의 것이니만큼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60142&cid=47322&categoryId=47322
고려 초와 신라 때를 같이 넘나들기에 이 책의 부분에선 집중이 조금 필요하다 . 고려를 이해하는가 싶으면 신라가 같이 의문부호를 안고 딸려 오는 것과 같아서 ... 그물에 엮인 듯 헤집어진다 . 한 줄기로만 이해가 되지 않는 형태 . 어쩌면 그런 것들의 모두가 역사인걸까 ?
고려의 지배층은 귀족인가 , 관료인가
고려가 국내외적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11세기 무렵부터 중앙 지배층이 문벌화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 이때도 물론 신진 관료들이 등용되었으나 문벌화에 따라 계층 이동이 상대적으로 주춤해졌다 . 고려는 능력 본위의 관료 임용과 승진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교육과 음서 등을 문벌에 유리하게 운영했다 . 이에 따라 고려 전기 중앙 지배층의 성격에서 귀속적인 요소와 성취적인 요소가 함께 나타났다 .
ㅡ본문 107 쪽 ㅡ
귀족제를 뒷받침하는 요소로 가장 강조하는 제도는 음서이다 . 음서는 자손이 조상의 음덕에 따라 관직을 가질 수 있도록 특혜를 주는 제도를 말한다 . 문벌귀족제론에서는 5품 이상 관료의 자손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시행한 음서가 있었고 , 대상자들은 대게 15세 즈음 그 제도를 이용하여 일찍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 한편 교육제도가 계층별로 차별적이었고 , 과거에서도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사람에게 특혜를 주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 과거제도도 문벌과 무관하게 시행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
ㅡ본문 108 쪽 ㅡ
초기부터 양천제를 기본으로 했던 고려의 신분제를 생각해보면 문벌귀족제론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 양천제는 원리적으로 천인만 배제하고 양인 내에서 권리와 의무상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제도이다 . 신라에서도 양인과 천인을 구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골품제가 강고해 한계가 있었다 . 그에 비해 고려에서는 지배층이라고 하더라도 신분의 생득적인 계승을 보장하지 않았다 . 그런 점에서는 조선도 고려와 다를 바 없었다 .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문벌의 존속 시기가 길지 않았고 , 과거의 비중이 커진 대신 음서의 비중이 낮았다 .
ㅡ 본문 110 쪽 ㅡ
물론 고려가 교육이나 관리 임용 제도등에서 지배층을 우대하고 조선에 비해 혈연적 배경을 중시한 것도 사실이다 . 그런 맥락에서 신라 말 고려 초와 고려 말 조선 초의 사회 변화를 고려한다면 고려를 신라 , 조선과 구분하여 문벌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
ㅡ본문 111 쪽 ㅡ
고려 사회를 이끈 힘
신라의 세습귀족제가 해체되고 지방 사회의 정치 - 문화적 역량이 상승하던 시기에 , 동아시아의 국제 상황도 크게 변화했다 . 중국에서는 오대십국의 분열을 거쳐 송이 등장했다 . 송은 경제나 문화 면에서 강국이었다 . 하지만 북방의 거란이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고려와 송을 압박했다 . 고려는 거란과의 대결 끝에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 송과는 공식 외교가 끊긴 상태에서도 경제 - 문화적 교류를 유지했다 .
ㅡ본문 111 쪽 ㅡ
신분제도를 보면 고려는 양천제를 시행하여 양인 배부에서 사 士 와 서 庶 를 구분하고 , 사 내부에서는 문반과 무반을 구분했으며 , 서인 내부에서 농- 공 - 상의 사회적 분업에 따른 계층 질서를 편성했다 . 공 - 상에 대한 차별은 그 직업을 낮잡아 보는 데서 출발했다기보다 전업 專業 유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만들어졌다 . 본관에 따라서도 계층적 위상이 달랐다 . 향 - 소 - 부곡 등이 본관인 사람은 양인 신분이면서도 차별을 받았다 . 그들은 잡척이라고 불리면서 국학 입학과 과거 응시가 금지되고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 그들이 다른 본관의 배우자와 자식을 낳아도 차별은 대물림됐다 . 본관에 따른 차별은 노비에게 적용되는 것과 유사한 원칙으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 공로나 범죄에 대한 상벌로 특정인의 본관을 향- 소 - 부곡에서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거나 일반 군현에서 향 - 소 - 부곡으로 강등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
ㅡ본문 114 쪽 ㅡ
고려에서는 다양한 층위나 요소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역동성이 커졌다 . 고려시대에 호족 ㅡ 문벌 ㅡ 무신 ㅡ 권문세족 ㅡ 신흥 사대부로 이어진 정치 주도층의 변화는 그런 역동성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 지배층의 잦은 교체는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라기보다 특정 신분이나 이념이 독점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 귀족제적 요소와 관료제적 요소의 정치적 길항 관계 속에서 역동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
ㅡ본문 117 쪽 ㅡ
무신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반적으로 무신정변은 무신에 대한 차별과 의종의 실정에 반발하여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 일각에서는 무신 차별이 정변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부터 무신이 양반 귀족의 일원으로소 내란과 외침에 대응해 꾸준히 지위를 상승시켰던 점을 고려하면 , 무신정변을 무신들의 현실적 세력 성장이 전통적인 억무정책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사거능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여기서는 여진정벌 , 이자겸의 남 , 묘청의 난 등을 거치면서 군이 여러차례 동원되고 무신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 주목했다 .
ㅡ본문 118 쪽 ㅡ
무신정변과 이후 약 100년 간의 무신 집권이 단순히 문- 무반 사이의 차별로 야기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 또 이 시기에 정변이 이어지고 농민 항쟁이 폭발했다고 해서 이때를 순전히 퇴행적인 시기였다고만 볼 수는 없다 . 무신집권기 역시 고려 건국 이후의 역사 흐름 속에서 문벌 사회가 고착되는 것을 막는 등 나름의 발전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
.
무신정변과 무신집권기에 이어진 정변 등이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지만 이로써 신진 관료들이 성장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도 권력을 잡는 기회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문반과 무반 사이의 소통의 길이 열렸다 .
ㅡ 본문 123 쪽 ㅡ
* 견해가 갈리는 지점인 음서와 문벌 , 과거와 문벌 등이 있다 . 과거가 음서를 넘어 능력을 발굴하는 제도로 역할을 다했는가 , 아닌가 하는 부분이 견해가 달리하는 관점의 대상 같다 . 그러니까 과거도 음서도 , 일부 층에게만 누릴 수 있던 또 하나의 신분제도가 아닌가 싶다 . 과거를 아예 볼 수도 없는 천민이 있는 것이다 . 어쩌면 그 신분들이 향 - 소 - 부곡 같은 차별로 노동력을 바치는 이들을 테두리 안에 가둔 채 자기들끼리만 관료직도 정치 입문도 능력을 키우는 일도 다 해 먹었던 세상 아닌가 ㅡ 하는 것 . 그러나 반대로 요즘의 모든 국민들은 종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가 제사로 조상의 음덕을 기린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경제력의 확산으로 보는게 좋을까 ? 조상을 기리는 일은 음덕을 바라는 모두에게 확대된 걸까 ? 아니면 신앙같은 것이 제사라는 형태로 자리 잡은 걸까 . 우리를 옛날의 사람들로 시대를 바꿔보면 우린 어떤 면에서 관직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게 재미있었다 . 단지 유치한 상상일 뿐이지만 ,
사상 , 경제 , 조직 등을 살펴본다 . 다원성이란 말이 자주 보이기도 하는데 , 이를 쓴 저자의 관점에서 본 해석인지 , 일반론 적인 견해인지 사실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 개인의 해석이라고 볼 수있는 부분은 마치 번역서를 한번 다시 번역한 듯이 ~ 보인다 . 정도로만 언급이 되기에 이런 부분이 과연 쟁점거리로 재정립 될 수 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 그냥 한번 내 스타일로 과거를 읽어봤어 ... 하는 느낌 . 책임 없는(?) 무게랄까 .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해석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 고루한 족보를 고루한 양반이 읽는 것처럼 . 그래서야 양반 족보 읽기 밖에 더 될까 ㅡ 싶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역사를 좀 들여다 보고 말하면 어떨까 , 하는 생각까지 든다 . 어쩌면 전무후무한 백지 상태의 인간이 보는 시대는 오직 왜 ? 왜 , 때문에 , 따위의 호기심 천국이 될까 ?
세번째 공부한당[ 2ㅡ1] 챕터를 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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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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