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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5.10.27
곡산연씨 최초의 족보인 경신보(1740년 발간)
곡산연씨 최초의 족보는 현재 1권만 전하고 있다. 이 족보를 보존하고 있던 문중인사가 대동종친회에 기증하자, 대종종친회에서는 이를 100부를 영인본으로 제작하여 전국의 각 화수회에 배포했다. 이 책은 영인본 중에 한 권이다.
20세기인 현재에 이르러서 문중이 무슨 의미가 있고, 족보의 유무가 무슨 관계가 있으랴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세계 각국을 떠돌던 유대민족이 2천년 만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던 저력은 그들의 신앙심에 있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유대민족이 전 세계를 유랑하는 동안 그들은 혈통마저도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다.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건국했을 때 이스라엘의 국민이 되는 기준 중에는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 항목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에는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있던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신앙심을 간직하였다.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 중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뿌리가 있다. 그들은 성서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면서 2천년의 유랑기간을 버틴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성서에 해당되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 문헌이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족보가 아닌가 싶다. 나는 경주김씨다, 밀양박씨다, 전주이씨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다. 나의 성씨인 곡산연씨는 인구 3만 명 남짓, 성씨 순위 76위의 희성이다. 많은 국민이 기억하는 역사적인 인물도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선조도 없고, 현대에서도 많은 국민이 기억하는 문중 인물이 누구라고 말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그런 곡산연씨에서 족보는 있다. 곡산연씨의 족보 형성과정은 비슷한 세력을 지닌 소수성씨의 족보 형성과 유사하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곡산연씨의 족보 형성 과정은 소수 성씨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노력한 다른 문중의 역사 연구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 예스24 인문교양 분야의 포스팅 주제로 삼아 보았다.
1. 곡산연씨 최초의 족보 경신보
가. 발간연도 : 1740년 발간(영조 14년)
나. 편찬자 : 예산현감 연수창
다. 발간 과정
1)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도움
조선 18현의 한 분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외증조부는 연산군 1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현감을 지낸 연인이다. 송준길 선생은 외증조부의 행장을 작성하면서, 진외가인 곡산연씨에 족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문중의 다양한 자료의 수집하여 초록을 작성하였다.
2) 의민공 연최적 선생의 족보 편찬 노력
의민공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제자로 약관의 나이로 숙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한 문중의 동량이었다. 그는 송준길 선생의 도움으로 족보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스승인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족보 서문을 받았다. 그러나 숙종 19년에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어전에서 혹형을 받던 중에 옥사했다. 이로 인해 족보 편찬은 무산되었다.
3) 예산현감 연수창의 족보 편찬
연수창은 의민공 연최적의 자제이다. 그는 영조 13년(1733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봉기하여 대적한 공으로 원종공신의 녹권을 받고 예산현감에 제수되었다. 관직에 제수되어 여유를 찾은 그는 선친이 수집한 각종 자료를 보완하여 1740년에 곡산연씨 최초의 족보를 발간하였다.
4) 정후공 연사종의 존재
정후공 연사종은 조선 초기 4대(태조~세종)의 임금을 모신 명신으로, 3공신(회군, 개국원종, 좌명)의 녹권을 받았고, 곡산부원군으로 피봉되었다. 별세했을 때 세종임금이 사흘간 조회를 파했을 정도로 조정에서 존중받는 원로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121회나 실려 있다. 경신보 족보에는 그의 아우인 연사준, 연사화는 이름만 전할 뿐 후손이 표기되지 않았으니, 초기 족보만 놓고 판단하면 그은 곡산연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5) 서인 문중의 도움
의민공 연최적이 인현왕후 복위를 위해 상소를 올리는 용기를 냈고, 끝내 어전에서 옥사한데 공을 인현왕후의 복위로 권력을 잡은 서인 문중에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로 인해 좌의정 송인명 등이 초간본 족보 발간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6) 연일정씨 족보
연일정씨 족보에는 외가의 3대(증조부)까지 기록되어 있다. 포은 정몽주의 부인인 정유는 연단서의 사위이다. 즉, 포은 선생의 조모가 곡산연씨인 것이다. 그로 인해 연일정씨 족보에는 정유의 장인인 연단서, 처조부인 연조, 처증조부인 연경이 실려 있다. 그로인해 ‘연경-연조-연단서’의 실존이 다른 족보에서 객관적으로 확인이 된 것이다.
7) 족보 형성의 기본이 되는 자료
곡산연씨의 시조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인가 등은 아직도 문중에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초간본 경신보에서는 복야공 연수창을 시조, 태사공 연경을 2대조, 대제학공 연조를 3대조, 대장군공 연단서를 4대조, 곡성군 연주를 5대조 등으로 보고 있다. 즉, 이 다섯 분까지는 단일 계보로 내려오다가 곡성군 연주 선조가 4형제를 둔 것으로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실존인물인가?
라. 경신보에서 밝힌 시조와 주요 인물
시조 복야공 연수창 :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었을 때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여 입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분의 실존은 정사에서느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순의 「만성보」에 “연수창은 중국 홍농사람인데 중국사신으로 고려에 왔으며, 벼슬은 좌복야다.”라고 기록되었다. 또, “홍농사람으로 문하대장군이며,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여 고려에 왔으며, 황해도 곡주(곡산)을 관향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이순의 「만성보」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이 있는지,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여 고려에 왔다는 두 번째 기록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등이 명확하지 않다.
2대조 태사공 연경 : 이 분이 남긴 한시도 있으며, 고려시대 문하시중, 태사, 태위로 추증되었ㄷ고 하는데, 한시외에는 이분의 행적을 확인할 수 없다. 즉, 연수창과 연경 두 분은 정사에서 확인하기 힘들고, 두 분이 부자 관계라는 것은 족보 이외는 근거가 없다.
3대조 대제학공 연조 : 조선에서 3공신(회군공신, 개국원종공신, 좌명공신)의 녹권을 받아서, 곡산연씨에서는 실존이 가장 확실한 정후공 연사종의 증조부이다. 증손인 연사종이 좌명공신이 되었을 때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고 한다. 즉, 이 분은 실존과 부자 관계가 명확한 최초의 선조이다.
4대조 대장군공 연단서 : 고려 시대 금오위 대장군으로 여진족 삼선삼개가 침입 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충신인 포은 정몽주의 진외조부(대장군공의 사위가 정유인데, 정유는 포은의 부친이다.)이다. 우리나라 대성 중에 하나인 연일정씨 족보에는 처가도 3대(장인, 처조부, 처증부)까지 수록했다. 연일정씨 족보에 연경-연조-연단서가 기록됨으로 인해 이 세분의 관계가 곡산연씨 족보 이외에 출처가 확실한 객관적인 문헌을 갖게 된 것이다.
5대조 곡성군 연주 : 고려 태조 이성계가 동향으로 태조로부터 건국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곡성군은 자신은 망국의 신하이므로 함께 할 수 없지만, 아들을 부탁한다면 차남인 연사종을 이성계에게 보냈다. 연사종은 15세에 이성계의 막하로 가서 23세때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회군공신이 되었고, 조선이 건국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의 휘하에 참가하여 좌명공신이 되었다. 아들인 연사종이 공신이 되자 3대(연주, 연단서, 연조)에 걸친 추증이 이루어진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으로 볼 때 곡산연씨 초간본에 있어서 시조는 연수창, 실존이 확실한 최초의 선조는 연경, 실질적인 곡산연씨 시조는 연사종으로 볼 수 있다.
* 자료 출처 : 사진은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곡산연씨 최초의 족보 영인본이며,
글은 문중의 각종 자료을 참고해서 작성했습니다.
이 글은 곡산연씨 대동종친회와 관련 없이 개인적인 연구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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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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