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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연공식계정
  1. 내가 아는 정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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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인의 활동에는 지식 문답이외에 오픈 지식 집필이 있습니다.
누리꾼들이 참가하여 사전을 집필하고,
그것이
기존의 국어, 백과 사전들과 함께 노출되는 시스템이지요.
저는 800여개의 글을 올린 바 있는데,
기록 차원에서 이곳에도 올리겠습니다.


---------------------




2006. 1. 11일 집필


 


선문답이란 불교 선종에서의 화두이다.
화두란 '불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 문제'를 뜻하는 말이다.


(* 참구 : 참선하여 진리를 연구함)

선종이란 과거에 불교의 양대종파였던 교종과 선종 중의 하나이다.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등 교학(敎學)을 중시하는 종파가 교종이고,


직관적인 종교체험으로서 선(禪)을 중시하는 종파를 선종이라고 했다.


 


선종은 석가모니가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설법할 때 나온 말이다.


설법이란 불교의 스님들이 제자나 신도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하는 말로


가톨릭의 강론, 개신교의 설교에 해당된다.


 


어느 날 석가가 영산(靈山)에서 설법을 하면서 말없이 연꽃을 들었다.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다른 제자들은 영문을 모른 채 석가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자 중에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연꽃을 가리킨 것은


연꽃이 물이 탁한 연못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웠듯이


너희(제자)들도 세상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아름다운 도를 깨치라는 의미라고 한다. 


거기에서 연유된 말이 염화시중, 또는 염화미소이다.


 


석가가 이와 같이 어떤 깨달음에 대하여 직접 설명하지 않고,


비유로써 전달하여 깨닫게 하는 데서 선문답이  연유했다.


 


선문답이 정착한 것은


그와 같은 이심전심(以心傳心)·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宗旨)로 삼고,


종파를 성립한 선종의 개조(開祖)로 전해지는 달마(達磨)가


서기 650년경 중국에 입국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 선문답은 혜가(慧可)·홍인(弘忍) ·혜능(慧能) 등으로 계승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 이심전심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함


  불립문자 : 불도의 깨달음은 문자나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

선문답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 시대인 784년(선덕왕 5)인데,


중국 당(唐)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받아온 도의(道義)가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것을 효시로 보고 있다. 


이후 신라에서 선종 9산문이 성립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화엄종 ·법상종 등의 교종이 번성하면서


선종이 일시 쇠퇴하기도 하였지만,


고려 명종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寺)를 세우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설립하면서 다시 번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의해 점차 쇠퇴하였다가


1424년(세종 6)에는 당시 불교 7종파를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폐합하면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의 세 종파가


선종으로 단일화되면서 지금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양종제도가 폐지되면서


국가 제도에서 멀어지며 선종 역시 산으로 숨어 들었다.


 


선종은 불교의 암흑기로 불리는


조선 시대의 산중 불교시대를 거쳐


휴정(休靜 : 서산대사)과 선수(善修)에 의해 중흥되었고,


이후 활발하게 선법의 계통을 이어갔다.


 


선종은 포교활동이 자유로워진 한말 이후에는


원종(圓宗) ·임제종(臨濟宗) 등으로 불리다가,


1941년에는 조계종이라는 오늘날의 종파 명칭을 확정하였다.

한편, 선문답이란 용어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인


협산 선회(夾山善會)의 일화에서 유래한 화두 라고 한다.



한 승려가 협산에게 ‘어떤 것이 협산의 경계입니까?’라고 묻자,
협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으로 꽃을 물고 온다.’


 


불교의 문외한인 보통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질문도 난해하고, 대답도 엉뚱하게 보여진다.


 


그 물음과 대답이 나온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에 협산은 영천선원(속칭 협산사)에 불법을 펴고 있었다.


승려의 질문인 "어떤 것이 협산의 경계입니까?"는


협산의 경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라는 위치나


협산이라는 산의 경치가 어떠냐는 풍경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의 의미는 


협산 선회가 얻은 깨달음의 경지가 어느 정도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협산이 이런 대답을 한 것이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으로 꽃을 물고 온다."


 


승려는 협산이 깨달은 경지를 물었는데,


협산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협산의 경치를 이야기했다.


 


동문서답인가?


그렇지는 않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에서 꽃을 물고 온다."


 


이 대답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협산의 경치를 말한 듯하지만,


숨어 있는 뜻은 다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나는 산의 아름다운 풍경처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


원숭이가 새끼와 함께 산으로 돌아갔고,


새는 꽃을 물고 산과 하나가 되었듯이


자신도 아름다운 산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산(깨달음)과 하나가 된 것이 나의 경지인데


깨달음이 어떤지 굳이 물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뜻이다.  


 


최근에 일반 대중에게 유명했던 선문답으로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 끝은 왜 보나?"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도 달과 손가락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비유하고 있다.


달은 부처의 경지나 깨달음,


손가락 끝은 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나 설명이라고 한다.


 


"달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저 하늘에 있지."라고 대답하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고 하자.


그러먼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을 봐야 달이 보이는데,


손가락 끝을 보면서 "아무것도 없는데요. 어디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성철스님의 말씀은 견월망지(見月望指)에서 온 말이다. 

달을 보라고 달쪽을 향해 손짓을 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

쉬운 듯하면서도 상당히 오묘한 뜻이 담긴 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유추해야 한다.
이런 예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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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가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밥을 먹을 때는 위생에 조심해야 되니 밥그릇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
그러면서 밥그릇에 조금이라도 얼룩이 지면 크게 야단을 쳤지요.
며느리는 심성이 고왔으므로 어머니 말씀을 명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며느리가 밥을 퍼서 방으로 갔고 갔는데,


밥그릇에 약간의 얼룩이 묻었습니다.
"이크, 시어머님이 보시면 야단이 나겠다."

며느리는 깜짝놀라서 시어머니가 보시기 전에 밥그릇을 닦으려고 했지만,


행주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발치에 방걸레가 보이기에 그것으로 그릇을 닦았지요.

며느리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휴~ 이제 깨끗해 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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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럴까?
오히려 방걸레에서 갖가지 세균이 묻었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청결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지만,
며느리는 실제적인 청결이 아닌 형식적인 청결만 찾다보니


오히려 더욱 오염을 시킨 것이다.

성철 스님은 부처가 되는 길을 선문답을 통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노스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을 닦기 위해 불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제자는 마음을 닦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불경만 읽고 있다.

그 때 노스님이 외치신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 끝만 보고 있나?"

부처가 되는 한 방법으로 불경을 읽고 염불을 하라고 했더니,
부처의 길은 포기하고 엉뚱한 형식을 따르며


미몽에 바진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이 말이다.


 


"부처는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대해


스승이 "네 마음에 있다 ."라고 대답했다면,


스승이 주려는 가르침의 의미는


부처를 닮으려는 마음을 지녔을 때 부처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제자가 도둑같은 마음을 품고서


"아아, 부처란 나같은 도둑의 마음이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선문답이란 이와 같이 비유를 통한 문답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의 길을 전하고 깨닫는 공부법인데,


가르치는 이의 뜻을 배우는 이가 깨달을 때 비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 자료 출처 : 2005년 8월 6일의 답변을 일부 고쳤고,


    내용은 제가 알고 있는 상식과 learz님의 답변 등을 참조하여 작성했으며,


    선문답의 풀이는 저의 생각을 나열한 것입니다.


    저의 깨달음이 부족하고 공부가 부족하므로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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