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랑의 파란

차해완
- 작성일
- 2021.3.21
밤의 숨소리
- 글쓴이
- 치아 저
피카(FIKA)
밤의 숨소리. 내숭없이 솔직하게, 어른들을 위한 관계 수업.
나는 다음과 같은 책 설명을 읽었을 때 어리석은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 책이 폐쇄적인 성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진짜 '성'을 알려주고, 진짜 '어른'이 되는 길로 인도해 줄 거라고 말이다. 아, 멍청한 기대였다.
이 책은 몇 부나 찍혔을까? 이 책을 찍어내기 위해 몇 그루의 나무가 무참히 흙바닥 위를 뒹굴었을까? 참담한 심정이다.
이 책은 상담사 치아라는 사람이 블로그에서 했던 고민 상담들을 엮어서 낸 책이다. 궁금해서 저자의 블로그에 들어가 봤더니 다양한 고민 상담들이 많았다. 메일로 사연을 보내면 저자가 답변해주고, 사연자는 도움을 받은 만큼 만 원 이상의 상담료를 납부하면 된다.
사연은 가지각색이다. 성별도, 나이도, 사연의 결도 전부 다르다. 하지만 사연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건 저자의 답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묘하고 영특한 사람이다. 아, 그에겐 과분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표현은 혹시나 그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으니 마음에만 담아두겠다. 저자는 나름 우리가 납득할 만한 답변으로 글을 이끈다. 하지만 그 흐름을 찬찬히 따라가다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점이 나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그런 경험을 했고, 나의 생각을 납득시키기 위해 두 가지만 발췌해서 가져와보았다.
1. 페티시
후루룩 넘기듯 읽으면 어폐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게 작가의 의도이며 글솜씨다. 차근차근 따라가며 읽어야 한다.
누구나 페티시를 가질 수 있다. 페티시를 변태 성욕과 성적 취향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1)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능한가.
2) 타인에게 해를 주는가.
사연자가 말한 스타킹 페티시의 경우 상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수준이고, 사연자는 버려지거나 구매한 스타킹을 이용했으므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적 취향이다.
여기까지가 저자의 주장이다. 술술 넘겨가며 읽으면 틀린 곳이 없다. 하지만 이 글은 많이 틀려먹었다.
사연자가 갖고 있는 페티시는 사실상 '스타킹' 페티시가 아니다. 그는 '누군가 입던 스타킹'에 대한 페티시가 있는 거고, 그 말인 즉 스타킹에 남아 있는 누군가가 남긴 체취에 페티시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스타킹은 맨 하반신을 감싼다는 점에서 그가 신체의 어느 부분에 흥분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것까진 그래,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능하다고 치자.
그러면 이 페티시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 구매한 스타킹은 제쳐둔다고 해도, 누군가 버린 스타킹이 어떻게 이것과 같은 선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만일 같은 반 남학생이 내가 버린 스타킹을 가져다가 냄새를 맡아가며 자위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을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 여학생이 모르고 있을 뿐, 알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내가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나의 체취가 남은 무언가를 들고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싫다. 게다가 저자는 여성도 제복이나 굵은 팔뚝, 낮은 음성 등이 페티시를 느끼므로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했다. (앞뒤 맥락을 고려했을 때, 남성들에게서 페티시가 더 많긴 하지만 여성들도 갖고 있으니 그리 심한 죄책감은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인 듯하다.) 하지만 사실 엉덩이, 발, 스타킹, 속옷과 제복, 굵은 팔뚝, 낮은 음성이 같은 선상에 오른다는 것도 어폐다. 결국엔 뜯어보면 맞는 말이 없다.
아... 애인 다음에 생각하는 게 성매매라니. 참 암담해지는 사연이다. 뭐, 저자는 이 지점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글을 멀리서 보면 어폐를 찾기 어렵다. 전반적인 흐름은 상당히 교과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이 있을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이런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으며, 이렇게 노력하면 된다. 의 전개.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그런 말이구나,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습지 않은가? 대부분의 야동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제작되고 유통되지 않는다. 저자는 소위 '몰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수많은 영상들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죽였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애초에 '일반적'이라는 표현은 '일부에 속하지 않고 전체에 걸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일반적인 야동'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제작되고 유통되는 것들'에 가깝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야동 시장의 실태를 모르는 건지, 모르고 싶은 건지 궁금하다. 더불어 야동이 적절한 성적 요구 해소 방안이라면 왜 하나같이 남성향 짙은 영상물들만 존재하겠는가?
316페이지나 되는 글이 전부 틀렸다는 오만한 발언은 하지 않겠다. 이 책엔 분명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걸 알려줘야만 안단 말인가? 싶은 당연한- 상식들도 담겨 있다. 연인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말 것,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질 것, 나 자신을 사랑할 것 등을 말이다. 가장 좋은 피임 방법이 콘돔이며, 그 다음으로 피임약이라는 것. 질외사정은 절대 피임의 방법이 아닌 것까지도 당연하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덧붙일 말이 없다. 칭찬을 하기엔 우습고, 격하를 하기엔 그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상담의 중간중간에 녹아 있는 저자의 견해는 하나같이 어폐투성이다. 물론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을 꼬집어서 읽는 나를 예민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글의 마지막은 우리가 아는 상식을 언급하기 때문에 '찝찝하긴 해도 마무리가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적어도 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또 성에 관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다면 이런 글은 쓰면 안 됐다. 최소한 자기 블로그에서 끝냈어야지 수백그루의 나무를 희생해가며 출판해서는 안 됐다. 글엔 어찌되었던 저자의 사상이 녹아드는 법인데, 그 사상이 혹시라도 성에 관해 잘못된 신념을 가진 누군가에게 안심을 줄까 싶어 두렵다.
만일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성에 관한 '상식'을 위주로 책을 집필했더라면 좋은 성교육 도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번에 비슷한 주제로 책을 내게 된다면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시길 바란다. 출판을 위해 노력하셨을 모든 이들의 커리어에 하나의 오점이 남은 듯하여 아쉽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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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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