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에 쓴 리뷰들

異之我...또 다른 나
- 작성일
- 2020.9.18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 글쓴이
- 고병권 저
천년의상상

<가내수공업에서 매뉴팩처 공장으로 노동자들은 일터를 옮겨갔다> (출처: 나무위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주권을 한 사람(국왕)에게 위임하여 통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만인은 각자를 위해서 투쟁적일 뿐이니 '정치전문가'인 국왕에게 주권을 일임하고 감시하는 역할로 물러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다며 초기 형태의 '사회계약론'을 주장했더랬다. 그런데 '매뉴팩처 시대'가 도래하면서 '거대공장'이 만들어지고 가내수공업에 머물러 있던 노동자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흡수하여, 마치 '한 사람의 거인'처럼 노동자들을 일사분란하게 일하도록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분업'을 통해서 생산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따로' 일을 하는 난쟁이 노동자가 아닌 '일사분란'하게 공동의 작업을 해내는 '거인 노동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의 효율적인 면에서 '거인 노동자'의 탄생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해서 소비자에게 더 많이, 더 싸게 '상품'을 공급할 수 있으니 대단한 효율인 셈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 노동자의 처지로 '거인 노동자'를 보았을 땐, '동일한 시간'을 일하며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효율성을 낳았는데도 '임금'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이득도 없는 '노동 방식'이었던 셈이다. 노동자는 별다른 생산효율성을 얻지 못하고 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 이런 방식의 착취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창출'을 위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또 다른 잉여노동'을 찾아냈다. 이전의 '천재성'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다면, 이번의 '천재성'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건드리지도 않고 '잉여가치'를 창출해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만큼의 생산을 한 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초과한 만큼의 생산을 한 시간이다. 이를 더 쉽게 표현하면, '필요노동시간'은 자본가가 본전을 챙긴 노동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자본가가 착취로 챙긴 노동시간이란 말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잉여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리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복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루 16시간이고, 20시간이고, 필요하다면 연장근무를 통해서 40시간까지도 '합법적 노동시간'으로 만들어서 '잉여노동'을 늘려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체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고도 '필요노동시간'은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천재적인 발상을 해낸 것이다. 바로 일사분란하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거인 노동자'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전부'가 아닌 '부분 노동'을 시키려 한다. 왜냐면 '분업'을 해야만 노동생산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인 노동자들은 '전체의 공정'으로 나누어서 각자의 분업을 특화해서 할 뿐이다. 하나의 바늘을 만들기 위해 '철사를 자르는 사람'은 자르는 작업만, '구멍을 뚫는 사람'은 뚫는 작업만, '뾰족하게 가는 사람'은 가는 작업만 하게 된다. 이렇게 한 가지 작업에만 오랜 시간 하다보면 '신체가 특수하게 변해 버린 사람'이 된다. 쉽게 말해, '가위질을 잘 하는 노동자', '망치질을 잘하는 노동자', '숫돌을 잘 돌리는 노동자'로 점점 변하고 만다. 자신이 맡은 공정은 누구보다 잘하는 '전문가'가 되지만 다른 공정의 작업을 할 수가 없는 '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단순 반복을 위한 작업에 특화된 '신체변형 노동자'가 되어 버린 뒤에는 노동의 보람이나 즐거움 따위는 느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노동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져 버리고 만다. 커다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지고 빠른 속도로 건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구나 힘들게 노동한 대가인 '임금' 또한 형편없다. 빈곤에 빠진 노동자계층은 어느새 자본가들이 마련해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니, '안달'이 아니라 '생존'일 것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노동자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버린 노동환경이 자본가의 거대한 공장 '매뉴팩처'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자본가들이 돈을 버는 길은 '상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비싼 상품'이 아니라 '많은 이윤'인 탓에 상품을 '고가'에 파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고부가가치', 다른 말로 '고잉여가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값싼 상품을 마구 만들어내는 '값싼 노동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했으며, 더 많고 더 넓은 시장의 확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안락한 노동환경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서도 '노동강도'는 절대 낮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힘든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혁신적인 기계'를 내놓는다고 해도 자본가들은 이런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고잉여가치'를 위해서 박차를 가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지취자 역할'만 맡는다. 이를 테면, 양계장 주인은 암탉의 달걀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고려하며 24시간 '백열등'을 켜놓는 것 대신에 '적색 LED등'으로 교체하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지만, 늘어난 달걀 생산량만큼 지치고 힘들 암탉의 건강증진을 위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왜냐면 양계장 주인은 달걀을 직접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백열등'일 때보다 '적색 LED등'으로 교체하면 한 달에 약 8000만 원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결과를 보면 더욱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가는 거인 노동자의 협업을 지휘하면서 '함께' 노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CEO라고 부르는 이들의 평균 연봉은 일반 노동자들의 약 40배나 된단다. 삼성전자의 경우에는 그 격차가 200배가 넘었고, 미국의 기업은 무려 270배 이상일 정도였다고 한다. 노동자간의 임금 차이는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보다 훨씬 적었던 것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에서 일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노동자일까? 아님 CEO일까? 물론 CEO도 기업을 운영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기업을 운영하는 일이 '전체 이득의 대부분'을 가져도 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걸까? 과연 CEO의 몫은 정당한 걸까? 혹시 '거인 노동자의 몫'을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고 독차지한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는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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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