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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징비록
글쓴이
류성룡 저
출판사
서해문집
출판일
2022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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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미지

류성룡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다.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전적, 공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壯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부제학,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쳤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놓으려 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590년 우의정에 올라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선조를 모시며 평양으로 파천했다. 이때 나라를 그르쳤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는데,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려 하자 이를 만류했으며 일본과 화의에도 반대했다. 유성룡은 전란 기간 내내 군대 양성과 더불어 훈련도감 설치, 화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 확충에 노력했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징비록懲毖錄』 『서애집西厓集』 『난후잡록亂後雜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등이 있다.

책 소개

분야인문/역사
《징비록》의 밑바탕이 된 《서애집》
그 속에서 찾아내 엮은 ‘종군의 기록’ 추가 수록!


‘2014 개정증보판’ 《징비록》은 기존 《징비록》(2003년 출간)의 내용상 오류를 바로잡고 편집을 새롭게 했을 뿐 아니라, 유성룡이 《징비록》을 쓰는 데 밑바탕이 된 글을 모아 ‘유성룡 종군의 기록’이란 이름으로 뒤에 덧붙였다. 그 글은 유성룡의 저작집인 《서애집》에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옮긴이가 직접 가려 뽑고 요약, 정리한 결과물이다. ‘때에 맞춰 해야 할 일을 분야별로 아뢰는 글’, ‘평양을 수복한 뒤 세자에게 아뢰는 글’, ‘굶주리는 백성의 구원을 진정하는 글’, ‘훈련도감을 설치한 기록’, ‘이순신을 애도하는 시’ 등의 기록을 통해 독자들은 《징비록》과 임진왜란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사년 10월, 거가가 환도하니 불타고 남은 것들만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 더해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길에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에 맞먹을 정도였다. 그 냄새가 너무 더러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어, 죽은 시신이 보이면 순식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이 낭자했다.
- ‘유성룡 종군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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