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소개된 작품들은 한글구체시다. 한글구체시는 첫째, 아주 짧다. 짧은 문자의 선을 이용하며 마치 그림처럼 전달할 수 있다. 하나의 단어 또는 음절 한 두 개로 삶의 핵심을 건드린다. 그리고 최소한의 변화만 음절단위에서 허락한다. 한글구체시 1에서 그렇듯이 “할”이 “헐”로 바뀌면 된다. 노인 같이 보이는 하나의 형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효과가 새롭게 생길 수 있다.
둘째, 단어의 배열을 새롭게 하며 효과를 자아낸다. 한글구체시 2에서 그렇듯이 “무덤”과 “무덤덤”, 두 개의 단어에서 음절 배열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무덤은 “무”로 표현되고 두 개의 표정 없는 망부석은 무덤 옆에 “덤덤”하게 마치 그림처럼 서 있다.
셋째, 한글구체시는 언어의 갇힌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의 열린 세계를 지향할 수 있다. 독일 녹색당의 한글구체시에서 보여주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초록색 복음”을 독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새롭게 전달할 수 있다.
넷째, 게다가 한글구체시는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다만 서너 개의 음절로 대우주를 작은 평면 위에 표현할 수 있다. 게다가 관찰자인 “나”의 미미한 자리가 광대무변의 영원한 우주에 함께 자리 잡을 수 있다.
다섯째, 500년이나 지속된 왕조의 역사까지도 작고 좁은 구체시의 평면에 거의 입체적으로 담을 수 있다. 작품 평면의 중심 속으로 속수무책 빠져드는 이씨왕조의 종말이 ‘사면체 블랙홀의 그림’에 담겨져 있다.
1988년에 출판된 첫 시집 『한글나라』에서 한글구체시를 처음 발표한 작가는, 1979년에 독일에 첫발을 내딛고 유럽의 전위적 구체시를 독일의 문화현장에서 1981년에 직접 수용한 이후, 44년의 언어적 실험을 이 한 권의 시집에서 지구 속 다양한 삶의 현장과 함께 성큼성큼 때로는 아주 미세하게 풀어놓고 있다. 제목은 『세네시오 킬리만자리』.
세네시오 킬리만자리는 아프리카 동부 고산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며, 높이는 9m 그리고 수명은 400년까지 자랄 수 있다. 500년이나 지속된 한반도 마지막 왕조의 역사를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집제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문단에서 한글구체시의 위상은 마치 동아프리카의 고산지대처럼 황량한 황무지에 가까운 것이 그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