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개요〉
전통시대에 천문학은 어떤 학술이었는가
“하늘을 삼가 공경하여, 일월성신을 역상하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려준다.” 『서경』 요전의 이 유명한 구절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전통시대에 천문학은 동아시아인들이 신뢰할 만한 모든 권위와 가치를 최종적으로 의탁했던 하늘에 대한 학술이었다. 이론적으로 천문학은 하늘의 명을 받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에게만 실행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학술, 나아가 위정자가 정치를 위해 독점하는 학술, 즉 국가천문학이었다.
동아시아의 천문학은 서양의 것과 이름이 같을 뿐, 그 학술에 부여된 이념과 가치, 탐구의 목적과 방법, 사회적 기능과 역할, 다른 학술과의 관계 등 많은 것들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전통천문학은 오늘에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완전히 종언을 고하고 서양 천문학으로 대체되어 단절되어버린 학술이다. 때문에 동아시아의 천문학에서 그것이 현대천문학으로 이어진 천문학의 역사를 탐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 천문학사에서 얻은 이론적 창안과 진보를 측정자로 삼아 한국 천문학사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해왔다. 그러니 한국의 천문학이, 서양 천문학은 고사하고 그보다도 열등한 중국 천문학의 보잘것없는 아류가 아닐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기대와 역사적 실상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주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저자는 전통천문학에 대한 기존 관점의 전환을 제안한다. ‘한국에서의 천문학의 역사’를 탐구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을 탐구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천문학이 수행했던 역할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는 위해서는 천문학 지식과 천문학적 활동을 ‘이론적 차원’과 ‘실행적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역사 속에 서양의 것과도 중국의 것과도 다른 천문학이 있었으며, 그것이 한국의 역사를 보다 한국적이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가 강제하는 제약 속에서도 한국 왕조는 자국 내에서 독자적인 천문학을 실행할 필요가 있었고, 실행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실행하였다. 한국 민족은 공동체로 존재하는 내내 스스로 천문학을 실행함으로써 동일한 시간규범을 공유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하였다. 한국 천문학사는 이처럼 한국에서 천문학을 실행한 역사이며, 그것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의 내용〉
이 책은 기원전 4세기의 고조선 시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한국의 천문학사를 역법사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이 책의 최종적인 목적은 한국 천문학사를 ‘한국의’ 천문학사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천문학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지금까지 이론적 차원의 지식과 활동에만 중점을 두었던 천문학사의 연구 관점을 전환하여 실행적 차원의 지식과 활동을 중심으로 볼 때, 한국 천문학사의 한국적 특징이 제대로 드러난다고 본다. 그렇다면 한국 천문학사에서 드러나는 한국적 특성과 가치는 어떤 것인가. 저자는 이것이 “중국에서 발전한 이론의 실행과 한국화(韓國化)”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천문학사에서, 중국의 그것들과 다른 독창적인 천문 이론과 역법을 고안해냈는지, 중국의 그것들과 다른 독창적인 관측기구를 제작하고 독자적인 관측 데이터를 얻어냈는지를 찾으려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의 왕조에서 자신의 시간규범을 수립하고 이것을 실행하는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시간규범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각종 기반, 즉 지적, 물적, 제도적 기반은 무엇이었는지, 또 실행의 과정에서 한국적 독창성과 독자성이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한국 왕조는 존속하는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천변을 관측하고 기록하였으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자국의 역사를 편찬하고 반포하였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낮의 시각을 측정하고 이를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천문학사 연구는 천문과 역법의 실행으로 만들어진 역사 전체를 탐구할 때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