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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징비록
글쓴이
류성룡 저
출판사
더스토리
출판일
2023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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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미지

류성룡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다.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전적, 공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壯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부제학,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쳤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놓으려 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590년 우의정에 올라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선조를 모시며 평양으로 파천했다. 이때 나라를 그르쳤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는데,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려 하자 이를 만류했으며 일본과 화의에도 반대했다. 유성룡은 전란 기간 내내 군대 양성과 더불어 훈련도감 설치, 화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 확충에 노력했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징비록懲毖錄』 『서애집西厓集』 『난후잡록亂後雜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등이 있다.

책 소개

분야역사
영화 [한산][명량][노량]의 원작 모티브!
서애 류성룡이 “피를 토하며 쓴 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

국보 132호 오리지널 표지를 되살린 패브릭 양장 에디션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
임진왜란 7년, 피와 눈물로 쓴 통렬한 반성의 기록!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면서 전시내각의 총책임자로 나라를 이끌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난 그는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환난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을 집필했다. 『징비록』은 최고의 전쟁 기록물로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란의 원인과 전황 등을 치밀하고 입체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의 총책임자로서 여러 공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급박했던 전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서출판 더스토리는 독자들이 『징비록』을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원문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어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나라와 백성을 전란 속으로 밀어 넣은 위정자의 통렬한 반성은 물론, 후손들이 임진왜란 같은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류성룡의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국보 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의 초판본 표지를 사용한 고급스러운 패브릭 양장본으로 소장 가치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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