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시의 아버지’, 중세 영어의 초석을 다진 위대한 작가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사원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이 벌이는 ‘이야기 향연’
초서 시대 중세 영어의 원의미를 문헌학에 입각하여 우리말로 되살린 고증 번역판
▶ 초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양 작가 중 한 명이다. ─ 해럴드 블룸
▶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신의 풍요로움이 있다. ─ 존 드라이든
■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대주제 담은 중세 시대의 축약도
“이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찬 통로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길을 오가는 순례자에 불과하다.”
―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중세 서양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제프리 초서의 대작 『캔터베리 이야기』가 세계문학전집 439, 440번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15세기 초 엘즈미어 필사본을 저본으로, 평생 초서 연구에 매진한 이동일, 이동춘 영문학자가 초서 시대 중세 영어의 원의미를 문헌학에 입각하여 우리말로 되살려 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인간의 속성을 꿰뚫어 보는 초서의 혜안은 그만의 독특한 표현에서 발휘된다. 정교한 어휘 조합을 바탕으로 하는 비유, 상징, 반어 등은 독자에게 시대를 뛰어넘어 글의 맛과 멋을 제공한다. 초서가 다루는 영역은 성경, 역사, 고전학, 신화, 기사도, 점성학, 의술, 지리, 연금술, 의상, 절기, 음식, 식물 등 너무나 방대하여, 이 책은 흔히 중세를 비추는 거울 혹은 중세 시대의 축약도(縮約圖)로 불린다. 마지막 이야기인 「시골 사제의 이야기」에서는 중세의 신학적 교리를 연상시키는 죄와 참회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주제에 천착하는 초서의 투철한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작가 정신은 사랑과 결혼, 선과 악을 둘러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서도 지속된다. 초서 문학의 맛과 멋은 그가 구사하는 구수한 이야기체에서 발견된다. 그의 이야기는 여유로움과 웃음을 자아내는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훈과 생에 대한 깨우침을 담고 있으며, 심오한 종교적 묵상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스물아홉 명의 순례자들이 토머스 베킷 성인의 유골이 안장된 캔터베리 사원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기 위해 서더크의 타바드 여관에 도착한다. 여관 주인 헤리 베일리가 성지 순례를 가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순례자들에게 이야기 향연을 벌이자고 제안하고, 이에 스물네 명의 순례자가 무료 식사와 술의 영예를 얻으려고 각자 알고 있는 재미나고 유익한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준다. 기사, 방앗간 주인, 장원 청지기, 요리사, 법률가, 바스의 여장부, 탁발 수도사, 소환리, 수습 기사, 시골 유지…… 이들 중 최고의 이야기꾼은 과연 누구일까. 여관에 모인 순례자는 초서를 포함하여 전부 서른 명이기에 여관 주인의 말대로라면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수록된 작품 수는 120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작품의 수는 스물네 개이며, 그 가운데 두 개의 작품은 미완성 상태의 조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초서는 자기 작품 안의 많은 이야기를 오늘날 독자들이 볼 수 있는 일관된 순서로 정해 놓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이 당시 많은 독자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아마도 친구들이 필요에 따라 이야기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스물네 개 이야기를 일관된 순서로 배열한 것으로 생각된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화자는 다양한 신분 계층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하는 이야기 또한 그들의 신분 계층과 직업만큼이나 다양하다. 초서는 「총서시」에서 각각 화자의 인물, 복장,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 그들의 언행을 통해 당시 후기 중세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들 각자의 화자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할 것인지, 문학적 장르, 스타일, 음조, 가치관의 대립 혹은 차이를 독자에게 예측하게 한다. 대표적인 예로 『캔터베리 이야기』의 첫 두 작품인 「기사의 이야기」와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두 화자는 사회 신분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외모와 행동 또한 매우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차이에 걸맞게 그들이 순례 도중 하는 이야기의 문학 장르 또한 다르다. 기사의 경우, 그의 신분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고상한 내용의 이야기에 궁정풍의 로맨스 스타일을 사용하고, 방앗간 주인은 상스러운 내용의 이야기에 파블리오라는 음담패설의 스타일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