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랑은 없단다. 노모가 내게 베풀었던 것<br />만큼은 아니어도 노모를 무척 사랑했다. 지금<br />은 치매 전보다 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된<br />다. 더 사랑해야 하는 게 맞는데 치매가 완전 <br />심해지기 전보다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다.<br />3.4년 전만 해도 노모가 돌아가시면 그 후에 <br />내 맘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br />는데, 3.4년쯤을 같이 생활하면서 노모에 대<br />한 예전 사랑이 많이 희석된 것이다. 내가 생<br />각해도 내 자신이 괘씸하다. 죄송스럽다. 노<br />모는 나에 대한 사랑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br />는데... 여자의 일생이라는 게, 한 사람의 인생이라<br />는 게, 너무도 안됐다고 느껴지는 것이 노모<br />의 경우이다. 시집오신 후부터, <br /><br />노모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진 것이다. 말년에 결국 치매<br />가 왔고 치매후의 레퍼토리는 그 고생한, 시<br />집살이 얘기를 수시로 되뇌신다. 행복했던 기<br />억은 없으신 것이다. 너무나 애처롭고, 한스러운 삶을 사셨다. 시<br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는 엄청나게 심<br />한 시집살이를 하루도 빼지 않고 시키신 것 <br />같다. 한마디로 들볶는 것이다. 저녁이면 배겟잇이 <br />다 젖도록 우시는 날이 허다했고 자살까지 생<br />각하셨다니, 새색시가 시집을 와서 너무나 불<br />행했던 것이다.<br />20년 가까이 그렇게 대책 없이 살면서, 남편<br />의 중재와 남편의 사랑도 충분치 않은 날들을 <br />사셨다. <br /><br />어디를 데리고 놀러 가 본 적이 없는 아버<br />지, 교육공무원으로서 바깥일만 열심히 하시<br />고, 아내인 노모에게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br />거나 해결 방법을 만들어 주지 않으신 것에서<br />도, 나의 노모는 그 삶이 힘겨움으로만 살아<br />온 것이다.<br /> 들어보면 할머니의 힘들었던 시집살이는 되<br />뇌고, 중재를 못한 남편을 그래도 원망하지는 <br />않으셨다. 그렇게 여자의 삶도 없었고 자신의 <br />삶도 없이 고생만 하신 노모의 말년은, 치매 <br />때문에 온전한 말씀을 하시는 횟수가 적어졌<br />다. 노모의 아픔을, 노모의 눈물을 글로 남겨 <br />본다. 노모의 삶에는 내가 10살 때쯤 아버지의 바<br />람기 때문에 또 충격적인 아픔이 있었다. 그<br />래도 아버지를 사랑하셨나? 아버지가 바람을 <br />피우셨을 때, <br />시골의 농삿거리를 다 놔두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따라 <br /><br />수원으로 이사 하셨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아래서 그 <br />고통을 이겨 냈지만, 남편이 없는 집은 있을 <br />수 없으셨나 보다. 남편이 주는 자리가 중요<br />했던가 보다. 그때부터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좀 벗어났<br />겠지만, 남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br />겨간 것이다. 그래도 여자이셨나 보다. 엄마<br />의 마음은 항상 아버지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br />것을 느꼈다. 이사 후 그냥 지낼 수는 없으<br />니, 시장 포목전의 일감을 가져다 삯바느질을 <br />시작하셨다. 월세와 생계를 이어가야 했었다. 매 식사 때마다 남편이 집에 오기를 기다리<br />는 맘으로 밥을 해서 방 아랫목에 이불로 덮<br />어 놓고 기다리셨단다. 남편이 오지 않아 찬<br />밥이 되면 노모가 드시고 또 새 밥을 해 놓고 <br />대문 쪽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었다. 노모는 <br />사람이 좋다. 미련하리만큼 착하시다. <br /><br />며칠씩 아버지 얼굴을 못 보면 두 집 살림을 하는 <br />그 집을 찾아 갔다고 한다. 그때 그 집을 찾아 <br />왔다고 아버지의(바람 핀 남편) 매질도 있었<br />다고 들었다. 가여운 삶이었다. 시장 한복 바느질을 받아다 일거리에 집중이<br />라도 하셨으니 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br />그 시간들을 잠시라도 견뎌내는 길이 되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