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에서 시인은 멸망과 폐허를 화사하게 치장한다. 그것은 멸망과 폐허가 갖고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지우는 행위이면서 '더 이상 멸망과 폐허는 없다'는 시인의 우회적인 전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존재하는 폐허와 멸망이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겠는가. 현란하게 화장을 하고 있는 가면 아래 여전히 폐허는 남아 있다. 그러나 시인이 노리는 것은 폐허가 갖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에 화려한 가면을 씌움으로써 그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를 실재의 비극보다 더 큰 비극에 빠뜨림으로써, 우리를 비극으로부터 구원시키려는 시인의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