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동네방네 소개하고 싶은 좋은 책을 만났다.

중앙일보 국제부 임주리 기자가 쓴 책이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세계사에는 큰 관심이 없는, 교양머리가 다소 부족한 나 같은 사람에게 제격이었다.

국내 뉴스는 연예계 소식까지 샅샅이 찾아보지만 국제 뉴스는 좀처럼 눌러보는 일이 없던 나에게 이 책은 도끼처럼 많은 깨달음을 줬다.

먼저 이 책의 큰 미덕은, 영화라는 창을 통하기에 세계사로 들어가는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밥상 물가를 좌지우지하는 시대다.

미국과 중국의 다툼에 우리 주식시장이 요동친다.

유럽연합의 환경 정책이 당장 내가 다니는 회사의 올해 목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략) 세계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이제 우리에게 필수 교양이 됐다.

걸림돌이 있다면 그 정세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괜찮다. 우리에게는 영화가 있으니까.

프롤로그 ; 세상에 '남의 일'은 없다 中

만약 비슷한 내용을 '세계 패권전쟁의 모든 것' 같은 책(이런 책 제목이 있는 것은 아니고...) 으로 접했다면 1분만에 나는 책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재미가 있으면서 의미까지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의미 있으면서 재미까지 있기 또한 얼마나 힘든가. 그 어려운 작업을 이 책은 기특하게도 해낸다. 또 하나의 미덕은 영화에 편식이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영화를 통해 다양한 세계사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인어공주>(흑인배우 할리 베일리가 주연을 맡은 디즈니 영화)와 <겟아웃>을 통해 인종주의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고, <스패니쉬 아파트먼트>를 통해 유럽연합의 황금기 시절로 시계바늘을 돌린다. 하나의 유럽이던 EU가 왜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는지 쉽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블랙팬서>를 빌어와 아프리카 대륙이 마주한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일러주고 <뮌헨>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끝을 생각한다. <수리남>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소개하며 넓디 넓은 중남미를 함께 종횡무진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너무 최근작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올드하지도 않다. 할리우드 대작에만 편중되지도 않았으면서 대중성을 잃지는 않았다. 제목만 봐도, 내용만 슬쩍 읽어봐도 작고 아름다울 것 같은 영화들은 바로 넷플릭스에서 검색하게 만든다. 작가가 소개하는 영화 중 절반이라도 본다면 내 교양지수는 한껏 올라갈 것이다. 세계사 이야기는 대륙 한 곳이라도 빠질세라, 곳곳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부지런히 훑어본다. 대강 알면 아는대로, 머릿 속에 복잡하게 엉켜있던 내용을 한 번 정리하기에 좋고 모르면 모르는대로, 새 지식을 채우는 맛에 독자로서 읽는 맛이 난다. 책을 이미 펴낸 경력이 있어 그런지 글 공력도 상당해 에세이집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매 챕터마다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들어가서인지 도입부부터 이야기에 깊이 빠지게 된다.

고작 만팔천원에 이렇게 다양하고 유익한, 세계사 일타강사가 다정하게 짚어주는 듯한 '지금 꼭 알아야 할 지구촌 이야기 총망라 버전'을 봐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기 전과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공직할당제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대가 수백명 사망했다는 뉴스를 클릭해본다.

맞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생 시위대가 다치고 죽은 게 불과 십수년 전이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지, 싶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강의 교재로 써도 손색이 없는, 다정하고 똑똑한 이 책을 여러 주변인에게 권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아이와 내 아이가, 우리 아이들이 커서 자라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욱 평화롭고 더욱 아름다운 세계이기를 작가와 함께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