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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글쓴이
복거일 저
출판사
기파랑
출판일
2014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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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미지

복거일

1946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최전방에서 포병부대 관측장교로 복무했다. 전역 후 1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1987년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문단과 독자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주요 작가가 된다. 『역사 속의 나그네』(전 6권, 2015), 『높은 땅 낮은 이야기』(1988),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1994) 등 소설 수십 권을 출간하였는데, 그의 문학은 이전의 우리 문학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체역사소설, SF 등 상상력의 영역을 크게 확대한 작품들이었다.

한편 한국 사회의 갈등은 그를 소설만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사회·정치 평론을 쓰기 시작한다.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진화생물학, 천체물리학 등을 수용한 도저한 그의 평론과 에세이는 한국 사회의 금기에 도전하는가 하면 지식의 미개지를 탐험하기도 했다. 『현실과 지향』(1990), 『진단과 처방』(1994), 『자유주의의 시련』(2009),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1996) 등 평론집 수십 권을 출간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논객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시집을 상자(上梓)하면서 소설가, 평론가에 이어 시까지 글쓰기를 두루 섭렵하는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2014년 간암 판정을 받고, 그를 오랫동안 짓눌러 오던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전기소설 집필을 시작한다. 9.19 남북군사합의에 대해 여적죄, 그리고 김정은 반인도 범죄자 고발을 주도했다.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복거일은 책이 좋아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날, 넉넉한 보수를 주던 은행을 그만둔 이유도 오롯이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기도 한 작가이다. 작가는 문학 창작 활동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짚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여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불리면서 사회평론가로도 활동해 왔으며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하기도 했다.

복거일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실패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식민지 서울을 살아가는 반도인의 1년을 쫓은 작품인 『비명을 찾아서』로 1987년 데뷔하였다. 이 소설은 2002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SF 장편소설 『목성잠언집』으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다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전통 경제이론에 정통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전파에 앞장 서는 보수내 지식인으로 활동해 왔다. 1998년 한국어 대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영어 공용화' 제안으로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원화 대신 달러를 통화로 채택하자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탈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오장원(五丈原)의 가을』,『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장편소설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역사 속의 나그네』,『파란 달 아래』,『캠프 세네카의 기지촌』,『목성잠언집(木星箴言集)』,『그라운드 제로』,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문학평론집『세계환상소설 사전』, 사회평론집『현실과 지향』,『진단과 처방』,『소수를 위한 변명』,『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동화를 위한 계산』,『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주의의 시련』, 과학평론집『쓸모 없는 지식을 찾아서』, 산문집『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죽음 앞에서』,『현명하게 세속적인 삶』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역사가 말하게 하라』가 있다.

책 소개

분야역사
저명한 소설가인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가장 큰 목적,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6·25전쟁을 깊이 살펴야 한다”는 한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을 제대로 알기는 무척 어렵다. 20개국이 넘는 나라들이 가담한 국제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3년 넘게 이어진 이 전쟁에서 국제연합군은 40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공산군 사상자는 2백만으로 추산된다. 또한 3백만의 북한 주민들과 50만의 한국 시민들이 죽었다.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전투가 한반도의 여러 전선에서 벌어졌다.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저격 능선, 백마고지와 같은 격전지들에서 치열한 전투들이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났다. 그러나 전황이 이미 소강상태에 있었고 작전들이 ‘전선의 정리’와 같은 제한된 목표를 지녔으므로, 많은 병력들이 투입되어 엄청난 사상자들을 냈지만 전쟁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결정적 전투’는 분기점이 될 수 있었을 만큼 중요한 전투를 뜻한다. 춘천지구 전투(1950년 6월), 다부동 전투(1950년 8월), 인천 상륙작전(1950년 9월), 운산 전투(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12월), 흥남 철수작전(1950년 12월),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임진강 전투(1951년 4월), 그리고 용문산 전투(1951년 5월)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천 상륙작전만 빼놓으면, 이들 전투들은 그리 큰 싸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6·25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아홉 전투들이 모두 전쟁 초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공군에게 밀려 북한에서 급히 물러났고 서울까지 내주었던 국제연합군은 지평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 삼아 다시 공세를 취했고, 전황은 팽팽해졌다. 1951년 봄 중공군의 ‘5차 공세’를 국제연합군이 잘 막아낸 뒤로 양측은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이기려는 야심을 차츰 포기하게 되었다. 이어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결정적 전투들을 살피면, 전쟁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온다는 점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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