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독특한 형식의 포토-로망이다. 흑백사진 290장이 실려 있고 사진엔 말(글)은 한마디(한 단어)도 없다. 데리다는 철학-회화, 말-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사진을 통해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플리사르의 사진을 ‘해설’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감싸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사진과 텍스트는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보족적이며 독립적인 텍스트로 서로를 관찰하고 관찰당한다.
우리는 결국 이 사진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인물들은 떠나고, 돌아온다. 그들은 옷을 바꾸어 입고, 파트너를 바꾸기도 하지만 결국 왔던 자리로 돌아와 애초의 자세 그대로 사랑을 한다. 여기서 떠남과 돌아옴은 구분할 수 없고 심지어는 떠남도 돌아옴도 없다. 모든 것은 무한히 반복되고 변주되며 확장된다. 시간은 연기되고 공간은 서로 다르므로 어떤 의미도 확정할 수 없다. 최종 해석은 불가능하며 있는 것은 수많은 해석, 수많은 시선의 권리뿐이다. 데리다는『회화의 진리』에서 고흐의 구두 그림을 통해 말했던 것을 이번에는 사진을 통해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시선의 권리는 사진 속 그녀들의 시선의 권리, 사물들이 가지는 시선의 권리와 경쟁하고 투쟁한다. 그 어느 것도 어떤 위계적인 질서 속에서의 우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우주는 열려 있고 모든 것은 서로 다르며 무한히 반복된다. 이제 남는 것은 시선의 독재가 아니라 시선의 다양함이고 무미건조한 하나의 관점이 아닌 풍성한 차이의 향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