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들의 거대한 저장고, 다시 말해서 이미 형상화된
거대한 영역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재형상화하면서
사유의 혁신을 이루는 거죠. 혁신은 늘 형상화에서 형상화,
재형상화로 가면서 이루어집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해 프랑스의 두 철학자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대담집 『역사와 사회적 상상에 관한 대화』가 출간되었다. 대담의 주인공은 ‘대화의 철학자’라고 호명될 만큼 해석학, 역사학, 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섭렵하고 종합했던 폴 리쾨르(1913~2005), 그리고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을 창설해 관료제적 전체주의에 대해 격렬하고 집요한 비판을 전개하고 이후에는 경제학자, 정신분석학자로도 활동한 ‘정신의 거인’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1922~1997)이다. 두 사람의 대담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5년 3월 방송된 라디오 대담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두 철학자의 공식적인 대화는 이 라디오 대담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대담은 짧고 간단해 보이지만 두 철학자의 사상적 깊이가 응축되어 있고 문학, 역사, 사회학, 인류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만만한 텍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요안 미셸의 훌륭한 서문이 두 철학자의 사상적 궤적에서부터 기본 입장, 대화의 맥락까지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풍성한 해설을 제공해준다. 리쾨르 연구자인 김한식 교수의 옮긴이 해제 역시 이들의 철학적 배경과 그 현재적 의의에 대한 충실한 보충 설명을 더해준다. 두 철학자는 역사적 창조는 가능한가 아니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역사적 형상들에서 인간의 새로운 생산이 나오는가 하는 물음을 중심축으로 광범위한 토론을 이어나간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당구공처럼 때로는 서로 스치며 엇갈리고,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같은 곳을 향하다가 곧바로 멀어진다. 이들은 의견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순간에도 우호적인 성격을 잃지 않으며, 상대방에 대한 지적 존경심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