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언제든 재발한다. 매듭짓지 못한 과거는 현재를 옭아맨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거세된 역사 만들기는 또 다른 상처와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 누구도 마음 편히 과거를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절, 팔순에 가까운 한 여성 인문학자가 식민지 지식인으로 살다간 아버지의 안타까운 삶을 기록으로 남겼다. 1926년 만주 봉천에서 태어나 대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은 저자 나영균이 좇아간 아버지의 발자취는 고스란히 일제시대 우리의 역사로 되살아난다.
이 책 『일제 시대, 우리 가족은』은 식민지시대 전형적인 한반도 지식인으로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자 당대 엘리트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는 개인사적 기록물이다. 동시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돼 있던 당시 지식인 청년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던 아버지 나경석을 중심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고모 나혜석, 아버지의 친구이자 저자의 영어 과외 선생이기도 했던 춘원 이광수, 나혜석의 친구이자 이광수의 아내였던 허영숙, 아버지와 함께 3?1운동을 모의했던 김성수와 송진우, 한때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설가 심훈, 아버지의 사회주의 운동시절 동지인 김사국, 김약수, 박열,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서 만났던 신익희와 저자의 집에서 미군 장교들과 어울려 춤추던 거물 간첩 이강국의 애인 김수임, 고모부였던 김우영과 대학시절 저자의 은사였던 박마리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인물들이 ‘역사적 평가 대상’ 이전의 지극히 개인적인 표정으로 이 책 곳곳에 출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