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임수경 방북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공개 수배되면서 10여 년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베를린을 떠돌며 살았던 어수갑 씨의 산문집이다. 1부 ‘보리수나무 아래서’에는 독일에서 곤궁하지만 담담하게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담겨 있고, 2부 ‘질풍노도의 시대’는 서울에서의 대학 시절 이야기와 베를린으로 유학 온 뒤에 펼쳐진 운동가로서의 사회적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책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생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질곡의 수배자 생활을 거쳐 이제는 단조한 일상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저자의 치열하고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잔잔하고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유럽 내 민주화 운동의 역사, 낯선 타국에서 저자와 함께 울고 웃은 이들의 이모저모, 그가 바라본 독일 사회의 모습과 한국 사회에 바치는 애정 어린 고언들이 갈피갈피에 담겨 있다.
‘386세대’라고 통칭되는 운동권 출신들이 백화제방(百花齊放)하는 시대다. 이들은 여러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일부 인사들이 ‘운동의 꽃’이라면, 한 줌의 명예나 보상도 없이 운동을 이끌어 온 수많은 ‘익명의 뿌리’들이 있다.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이 책의 저자 어수갑과 같은 이들과 마주치게 된다. 책머리에 함세웅 신부가 언급했듯이 이들은 “참으로 5천 년 역사의 거목을 지탱하고 있는 땅속 깊이 자리 잡은 든든한 뿌리”다. 책은 어수갑이라는 한 ‘익명의 뿌리’의 올곧은 삶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