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
남의 인식론을 재조명하다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대표 저서인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선 정의』가 번역·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지식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남반구의 다양한 인식론을 복원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적 부정의와 인식론적 억압의 문제를 깊이 탐구하며,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 저자 산투스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학자, 법학자, 비판이론가이다. 그는 서구 근대성이 유일한 보편적 진리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해체하며, 다양한 지역과 문화에서 축적된 지식을 재평가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인식론 살해(epistemicide)’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지식 체계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비서구적 지식과 문화를 배제하고 억압해 온 과정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대안적 인식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은 ‘인지적 부정의(cognitive injustice)’라는 개념을 탐구한다. 이는 전 세계인이 삶을 영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인식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의미한다. 전 지구적 사회적 부정의는 전 지구적 인지적 부정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를 위한 투쟁이기도 해야 한다.
산투스는 서구의 지배가 오랫동안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의 기존 지식과 지혜를 철저히 주변화시켜 왔다고 말한다.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은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했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인식론적 다양성을 회복하고 존중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남의 인식론』은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를 제안한다. 이 서발턴적,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시장 중심적 탐욕과 개인주의의 논리를 넘어 공존, 연대, 그리고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