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소는 어떤 인상을 남겼을까.

내게 소는 실제가 아닌 활자로 먼저 다가왔다. 국민학교(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가 입에 벤 까닭) 5학년인가, 6학년 때 국어 교과서 앞부분에 실렸던 이야기에서 소를 만났다. 서너 살 무렵에 소를 봤음직도 한데 기억을 정리하지 못한 탓에 교과서 그림 속의 소가 더 친근하다.

학자금 마련으로 들여온 송아지. 꼴 베며 산책시키며 점점 송아지와 가까워지는 소년. 동네 어른들에 의해 송아지 코뚜레 다는 날, 그 울음소리에 마음 아파 자기도 그만큼 울던 소년…….

또 있다. 검은 소와 누런 소를 데리고 일하는 농부에게 황희정승은 누가 더 일을 잘 하냐고 묻는다. 정승이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와 가만히 누런 소가 더 잘 한다고 대답하던 농부.

함께 한 둘의 시간은 정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영화 <워낭소리>에서 재차 느꼈다. 일상의 소보다는 사육의 소에 치우친 오늘, <소>를 읽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전문)

시인 김기택이 바라보는 소는 수도승 같다. 세월을 견디며 깊은 고뇌에 빠진, 이윽고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듯 눈으로 말하는. 너무 많은 말을 뱉어온 내게 고요한 가르침을 주는 소.

시인의 눈이 소의 눈을 닮았다. 소처럼 묵묵히 밭을 갈지만 일상을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겨 시를 만든다. ‘직선과 원’에서는 개와 개의 활동 거리를 제한하는 말뚝으로 우리네 삶이 직선과 원 안에서 공존함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 ‘등뼈(개)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 거리’인 직선, ‘결렬할수록 완벽한 원주(圓周)의 곡선’을 그리는 원.

‘계란 프라이’에서는 시인의 눈이 더 치밀해진다.

한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물 한 모금 먹어본 적 없는 노란 부리와

똥 한번 싸본 적 없는 똥구멍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뒤섞여 응고된

계란 프라이

(‘계란 프라이’ 부분)

마땅한 반찬이 없는 날 나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뒤섞여 응고된’생명을 먹고 있었다. 시인은 때로 달팽이를 바라보며(‘얼룩’), 송충이를(‘유리창의 송충이’), 비둘기를(‘상계동 비둘기’), 토끼를(‘토끼’), 심지어는 귤을 바라보며 삶을 노래한다. 노인과 귤이 병치하면서 썩어가는 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육체를 말하고 있다.

노인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놓여 있다

며칠 전 딸이 사놓고 간 귤

며칠 동안 아무도 까먹지 않은 귤

먼지가 내려앉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귤

움직이지 않으면서 조금씩 작아지는 귤

작아지느라 몸속에서 맹렬하게 움직이는 귤

작아진 만큼 쭈그러져 주름이 생기는 귤

썩어가는 주스를 주름진 가죽으로 끈질기게 막고 있는 귤

어두운 방 안에 귤 놓여 있다.

(‘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