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김해진의 작품 에세이><br /><br />나는 "로서" 살아왔어.<br /><br />맏딸로서 장녀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가톨릭 신자로서 봉사자로서<br />강사로서 지역사회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살아왔지.<br /><br />나는 아마도 꽤 잘 해왔을 거야.<br /><br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모든 의무와 지위로부터 무너져 내린 거야.<br /><br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고 <br />해가 떠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지.<br /><br />나는 열심히 살았지만 성공은 멀었고<br />착하게 살았지만 마음은 텅 비었어.<br />의무로 살았지만 권리는 없었지.<br />나를 찾고 싶었어.<br />내가 누구인지 잘 몰랐고<br />행복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었고<br />그러나 그저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br /><br />그림을 그리면서 움츠렸던 마음의 위로를 얻었고<br />숨 가쁜 일상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 같았어.<br /><br />나의 숨구멍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