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김미현 세대가 써내려 가는
젠더 프리즘, 그 이후의 비평 지도
팔림프세스트의 책
故김미현 평론가의 마지막 평론과 제자들의 글을 한데 엮은 『젠더 프리즘, 그 이후』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민음의 비평’ 시리즈의 포문을 연 『젠더 프리즘』이 출간된 지 17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평론가 김미현은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문단과 학계를 종횡무진하며 오랜 기간 페미니즘 비평의 선두에 서 왔다. 2008년 출간된 『젠더 프리즘』은 당대의 문학을 젠더의 차원에서 주목함으로써 기존 페미니즘 비평의 맹점을 지적하고, 그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간 포스트페미니즘을 제안한 선구적인 책이었다.
『젠더 프리즘, 그 이후』는 현직 문학 연구자인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글 위에 써내려 간, 팔림프세스트의 책이다.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그리스어로 ‘다시(palin)’와 ‘문지르다(psaein)’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로, 양피지에 적혀 있는 글자를 문질러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글자를 쓰는 행위를 지칭한다. 그러나 지워진 글자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새로 적힌 글과 공존한다. 스승의 책이 제자들의 언어로 다시 쓰이는 일 역시 이와 같다.
이 책은 장 구분 없이 핵심 키워드들을 병렬로 배치했던 『젠더 프리즘』의 서술 방식을 따른다. 김미현이 남긴 글 위에 포스트-김미현들의 글이 덧쓰인다. 키워드 ‘몸’의 분석 대상은 타락한 여성의 대명사 이브의 몸에서 포스트휴먼의 몸으로 옮겨 가고, 이중으로 소외된 여성의 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키워드 ‘섹슈얼리티’는 자본주의 체제의 생명 정치적 자산까지 포괄하며 그 범주를 넓히는 식이다. 『젠더 프리즘, 그 이후』는 『젠더 프리즘』에서 피어난 빛을 더 넓게, 더 깊은 곳으로 퍼져 나가게 한다. 그것은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반사가 아닌,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며 분산시키는 회절(回折)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