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물질적이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 그래서 개인의 이익이 모든 도덕과 이념을 뒤엎는 시대. 그러기에 아무리 자신이 지지했던 정당과 이념이라도 그 정당과 이념이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를 끼쳐도 사람들은 욕하며 돌아선다. 자신의 아파트값이나, 주식가치, 또는 노후보장 등이 모든 이념과 가치보다 우선시 된다. 그리고 싫든 좋든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은 그런 시대의 가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가치를 가졌다면 그런 시대의 흐름에 몸부림을 쳐 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간다면 인간이란 가치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을까.

지금의 시대와 정반대의 시대가 있었다. 이념이 전부가 되는 시대가 있었다. 이념이라면 사람 몇 명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죽여도 되고, 그것이 오히려 정당화되는 시대가 있었다. 이념 앞에서는 가족의 정(情)이나 남녀 간의 사랑도 함몰되는 시대, 서로 간의 소통이 막히고 오로지 이념으로 하나가 되고, 이념으로 원수가 되는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는 최근까지 이어져 왔지만, 가장 극심한 때는 6.25 전쟁을 전후한 시대였다. 이렇게 이념으로 양극단을 치닫는 시대에 한 인간으로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개인을 그린 소설이 있다. 고 최인훈 작가의 [광장]이란 소설이다.

[광장]은 이미 학교를 다닐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고, 그중 한 부분이 교과서에까지 실리기까지 했다. 광장이란 소설의 주제, 작가, 그리고 배경에 대해서는 암기할 정도로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 소설을 읽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왜 이 소설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의 대표적인 한국 현대 소설이 되었는지를 알만 했다.

소설은 주인공 '명준'이 전쟁 포로로 인도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인도 국적의 배에서 명준은 자신과 같이 중립국을 택한 20여 명의 포로들과 함께 일본을 거쳐 홍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배에서 폭풍우와 같았던 지난 시기를 거쳐왔던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명준의 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월북을 한다. 명준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은행가인 변선생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거하면 도움을 받으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변선생에게는 태식과 영미라는 오누이가 있고 명준은 이들과 함께 친하게 생활한다. 태식과 영미는 자신이 가진 부를 마음껏 누리며 미국 음악과 댄스를 즐기며 산다. 명준도 가끔씩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만 회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북한에서 방송가로 알려지면서, 명준은 몇 차례 경찰서로 끌려고 매를 맞고 취조를 받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명준은 더욱더 남한에 환멸을 느낀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윤애를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 윤애와 깊은 사랑을 나누나, 우연히 북한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충동적으로 북한에 오른다. 그러나 북한에서 역시 그는 환멸을 느낀다. 그곳에서 은혜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은혜가 죽는다. 이제 전쟁 포로가 되어 북한과 남한에서 모든 것을 잃은 명준은 더 이상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중립국 행을 택한다.

어찌 보면 간단한 줄거리이지만, 이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는 명준의 눈은 날카롭다. 그는 남한에 있을 때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을 찾아가 자신이 보고 있는 남한의 정치 광장의 실상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한국 정치의 광장은 미국에 빌붙어 오로지 개인이 욕심만 챙기는 도둑들의 싸움터였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화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것과 뭐가 달라요? 그런 걸 가지고 산뜻한 지붕, 슈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구두 끝을 비비는 마루며, 덴마크가 무색한 목장을 가지자는 말인가요? 저 브로커의 무리들, 정치 시장에서 밀수입과 암거래에 새들과 결탁한 어두운 보스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과장과 이어져 있어요. - 중략 -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고,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고,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 정치가들이 정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죠 (P 60)"

북한에 가서도 강압적인 통치와 그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들을 보고 실망한다. 그는 북한에서 기자가 되어 감상적인 글을 섰다고 자아비판을 당한 후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 중략 -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 나옵니까?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바스티유를 부수던 날의 프랑스 인민처럼 셔츠를 찢어서 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인민은 어디 있습니까? (P 125)"

그는 자아비판을 당한 후 상관에게 영웅주의적인 감정을 버리고 강철과 같은 철저한 실천가가 되라는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저 뒤얽힌 산업 집설의 개미굴 속에서, 나날이 사람스러운 부드러움을 잃어가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라는 소리였다. (P 150)"

결국 명준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자신들의 이념을 이루기 위해 개인들을 부품화하고, 그런 시스템 속에서 권력을 누리는 몇 사람만이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제 그가 돌아갈 곳은 아무 곳도 없다. 마지막에 북한과 남한이 각자 체제 선전을 하는 가운데 '중립국!'이라는 소리만을 외치는 명준의 절규가 너무 가슴 아프게 와닿는다.

물론 이런 시대의 문제를 오로지 여성에 대한 사랑으로만 해결하려는 명준의 모습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로지 여성과의 사랑만이 모든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명준의 모습이 어쩌면 현실도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태백산맥의 김범우처럼 적극적으로 시대를 헤치고 나가려는 노력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론 당시 시대의 분위기에서 한쪽 이념에 미치지 않은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양편으로 갈라져서 자신이 절대 진리고 상대는 절대악이라고 외치는 시대에서, 양쪽을 다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 그 시대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한쪽에 들어가서, 그 사상에 미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열광하고 미쳐서, 그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일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린 명준이 살았던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