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나와 함께 가면 어떠하겠느냐. 내 뜻을 따라준다면 내 너를 고이 여기리라.”
“진정이시옵니까? 진정으로 고이 여겨주실 것이옵니까?”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사의서. 그곳에 몸을 낮추고 평생 숨죽여 살던 수륜. 황제를 의붓아비로, 태자를 동복형제로 둔 륜은 어미의 깊은 정 없이 자라다 황제의 배려로 사의서 태령이 된다. 어느 날 신기를 지닌 열다섯 소녀 달을 만나게 된 륜은 그에게 반한 달의 능력을 사건해결에 이용하기 위해 감언이설로 꼬여 사의서에 데려오는데…….
“거,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알아맞혀보아라. 내가 널 죽이겠느냐, 살리겠느냐?”
“살려……주소서. 소첩이 어여쁘지 않으십니까? 욕심내지 않으셨습니까? 온전히 다 드리겠습니다. 처녀이옵니다. 어떤 사내의 손길도 닿지 않은 새것입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참이오니 목숨만 살려주소서!”
“몸은 새것인지 모르나 네 마음은 노류장화보다 더 지저분하구나. 고약하다. 잘 가거라.”
2. 작가 소개
최은경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그리고 잘 웃는 사람.
자판 치느라 지문이 벗겨진 사람.
밤이 낮같은 야행성이 강한 묘한 사람.
늘 기도하는 사람. 최은경 프리실라.
▣ 출간작
〈내겐 너무 힘든 그녀〉, 〈무휘의 비〉, 〈다정다감〉, 〈현주효영〉, 〈3퍼센트의 사랑〉, 〈포춘쿠키〉, 〈섬라곡국 이야기〉, 〈청실홍실〉, 〈파란만장 미스 왕〉, 〈애흔〉, 〈디스코〉, 〈마이 레이디〉, 〈메모라이즈〉, 〈여우보다 늑대〉, 〈향몽〉, 〈팔미에〉, 〈화월〉, 〈눈물아 멈춰줘〉, 〈리틀 닥터〉, 〈취중담화〉, 〈1965, 서울〉, 〈아로하〉, 〈격애〉, 〈애담〉, 〈샤이닝 스타〉, 〈블루 하와이〉, 〈홀드 미〉, 〈청춘무곡〉, 〈문란뎐〉, 〈신부〉, 〈북풍〉 外
3. 미리 보기
“참으로 어리석지 않으십니까? 소녀가 아뢴 안마사 일은 까맣게 잊으시고 이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숙제의 답을 대라 하시다니요. 소녀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그래서?”
“그리하여 알긴 하오나 말씀드릴 수 없다 이 말씀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가 싫다?”
“그러하옵니다.”
단 한 사람의 생각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륜의 유혹해 제 욕심도 채우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팔로와 소선의 목숨까지 챙기리라 마음먹은 달은 요망한 입술을 계속 놀렸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습니다. 약속을 지키소서.”
“약속? 내 네게 약속을 했어?”
“이거 왜 이러십니까? 계화성에서 소녀에게 이르시길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그리하면 너 하기에 따라 비단 옷이고 패물이고 양껏 할 것이니라. 은밀한 처소를 주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줄 테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금세 잊으셨습니까? 이 말도 하셨습니다. 내 너를 고이 여기겠다. 고이 여기는 것이 골방에 처넣고 사람 명줄을 죄는 것이옵니까? 불한당 같은 놈에게 연거푸 봉변을 당하게 하는 것이옵니까? 흐흑! 흐흐흑!”
구슬프게 흐느끼며 다분히 계산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달의 혼신의 연기에 륜의 입매가 냉해졌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답이 무엇이냐.”
윽박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듯 낭랑한 목소리이건만 달의 가짜 눈물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뭐야, 눈물이 안 통해? 저거, 저거 목석 아니야? 아닌데? 분명 세웠는데?’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뚝뚝 끊어놓는다 정평이 난 울음에 백이면 백 안 넘어가는 사내가 없었던 눈물까지 합세했는데도 륜이 까딱을 하지 않자 달은 순간 당황해버렸다. 륜이 그녀의 속내를 읽어냈다.
“모르는 모양이군.”
“모른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속이 상해…… 헉!
궁색한 변명을 둘러대던 달이 숨을 들이켰다. 지니고 있는지도 몰랐던 단검을 소리도 없이 뽑은 륜이 섬뜩한 시퍼런 날을 목에 들이댔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찌, 왜…….”
“내가 귀히 여긴 건 마음을 읽어내는 네 능력이었다. 그러해 사사로이 내보여서는 안 되는 패를 내비쳐 널 구했는데 사기꾼에 불과한 것을 알았으니 어이 살려둘까? 그러니 널 죽여 내 흠을 덮을 수밖에. 아니 그러하느냐?”
눈은 공포로 활짝 열리고 맥이 뛰는 모든 곳이 펄떡거렸다. 목구멍은 꽉 졸리고 손끝 발끝까지 학질에 걸린 사람마냥 와들와들 떨렸다. 죽음을 통보하며 빙그레 미소까지 짓는 사신을 마주 대하는데 심장이 멎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거짓 눈물이 아닌 뜨끈하고 짜디짠 진짜 눈물이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그리고 경망스럽고 잔망스러운 기가 싹 사라진 달의 얼굴은 너무 하얗게 바라나 파르스름하기까지 했다. 뭇 사내들과는 확연히 다른 륜을 만만히 보게 만든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저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호들갑을 떨어댄 몸뚱이를 잡아 뜯고 싶고 어서 죽여달라 재촉한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살고 싶었다. 그래서 목구멍을 치솟아 오르는 비명을 꾹 내리누르고 먹빛이 된 입술을 움직였다.
“거,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알아맞혀보아라. 내가 널 죽이겠느냐, 살리겠느냐?”
달이 여전히 입가에 냉한 미소를 베어 문 륜에게 몸서리를 치며 매달렸다.
“아아! 나리. 참이옵니다.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분명 저는 그리할 수 있습니다. 보셨지 않으십니까? 믿으셨지 않으십니까? 허헉!”
륜이 단검의 손잡이를 살짝 비틀자 날카로운 날이 야들야들한 피부를 쓸어내리는 끔찍한 느낌에 달이 입을 쩍 벌렸다. 한숨과 함께 비굴한 구걸이 터져 나왔다.
“살려……주소서. 패를 보이신 것은 절대 발설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나 냉엄한 륜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사지를 잘라내더라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달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소녀가 어여쁘지 않으십니까? 욕심 내지 않으셨습니까? 온전히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눈여겨보아주소서. 제발…… 부디…….”
간절히 호소하며 몸을 움츠리자 미처 추스르지 못한 저고리가 때를 맞추어 슬그머니 흘러내렸다. 탐스럽고 뽀얀 젖무덤 두 개가 덜렁 드러났다. 겁 때문에 빳빳하게 돋아난 분홍 유두가 눈을 어지럽혔다. 뜻밖의 노출로 또 하나의 기회를 얻었다 생각한 달이 침을 꿀꺽 삼키고 더욱더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처녀이옵니다. 어떤 사내의 손길도 닿지 않은 새것입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참이오니 목숨만 살려주소서!”
륜의 이마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애초부터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능력이 없다 해도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는 잔재주며 두둑한 배짱이 있으니 잘 조련하면 앞으로 헤쳐 나갈 미궁 같은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나 수치도 모르고 미끈한 몸과 목숨을 교환하자는 천박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악취가 진동을 하는군. 온몸에 찌든 땟국을 씻어내고 새것으로 만들어야겠어.’
엉겅퀴처럼 뻣뻣하고 질긴 그녀를 제 뜻대로 쥐었다 폈다 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 극한의 고통을 주어 복종시키리라 마음먹은 륜은 싸늘한 입술을 열어 일말의 재고도 없음을 위장했다.
“몸은 새것인지 모르나 네 마음은 노류장화보다 더 지저분하구나. 고약하다. 잘 가거라.”
“허억!”
마음먹은 바가 있는 륜이 달의 목에 느슨했던 칼날을 바싹 가져간 그 순간! 무소가 우당탕거리며 문을 발칵 열고 들어섰다.
“나리! 이런!”
륜이 뒤돌아보았고 눈을 감는 것조차 잊어버린 달은 허깨비가 되어버렸다. 사건의 심각성을 한눈에 알아차린 무소가 잰걸음으로 걸어와 고했다.
“계화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전씨 부인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합니다.”
륜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리고 아직 하늘이 절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달이 눈을 뒤집으며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동백꽃처럼 뚝 떨어지는 달의 목에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비켜낸 륜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그녀에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