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읽기 교육이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하이데거의 논의에서 비롯되었다. 박찬국(2014)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과 엄태동(2016)의 『하이데거와 교육』을 읽으면서 하이데거의 실존론과 실존론적 교육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하이데거와 교육』에서 강조한 교육의 과제 중에, 연리지(連理枝)의 개념을 활용한 교육적 이행(異行)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교육의 지향이 스승과 제자가 연리지와 같이, 동행을 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길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호각(互角)에도 비유하여, 스승과 제자가 이행을 통하여 대등하면서도 경쟁적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행은 교육적 지향으로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행의 결과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스승과 제자가 각자의 학문적 역량을 길러 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어야 할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필요했다. 이 생각이 『천 개의 고원』에 기초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읽기와 읽기 교육의 지향이 ‘공존’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했다.
유목적 읽기를 하든, 생성적 읽기를 하든 또는 리좀적 읽기를 하든, 이들 읽기는 공존을 지향한다. 이들 읽기의 본질적 과제는 독자의 ‘자기 생성’이다. 독자는 텍스트를 읽고 새로운 자기 생성을 해야 한다. 텍스트를 이해한 독자는 새로운 독자여야 한다. 읽기의 근원적 본질이 독자의 자기 생성인 것이다. 이 독자의 자기 생성은 개별적이고 개체적이다. 이 자기 생성은 텍스트를 이해할 때마다 차이를 반복한다. 이로 독자는 무한히 다른 자기 생성을 이룰 수 있다. 이 독자의 무한한 자기 생성은 방향성과 가치성이 있어야 한다. 이 독자의 자기 생성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를 조율할 제한 조건이 필요하다. 이 제한 조건은 독자 내부에 있지 않다. 독자 외부에서 자기 생성의 방향과 가치를 조율해 주어야 한다. 그 외부가 텍스트이고, 다른 독자이다. 독자가 텍스트와 다른 독자와 함께 존재할 때, 자기 생성은 방향성과 가치성을 갖는다. 독자의 자기 생성에는 공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