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이후 서양의 개명진보와 대비되는 부정적 일상 개념으로 퇴행해 온 보수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와 탈냉전의 변화 속에서 진보의 정치적 대척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한 축으로서 보수라는 개념이 가져야 할 정치적 설득력은 개화기의 수구에 대한 부정적 기억과 보수 단색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회한의 기억 때문에 훼손되었다. 21세기 초 한국의 이념 지형은 좌와 우, 남과 북,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삼중으로 공고하게 겹쳐진 복합 지형이다. 그 밑바닥에는 60년 넘게 켜켜이 쌓여 온 상호 불신과 애증의 상흔이 가라앉아 있다. 민주화 이후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뿌리째 비틀어 온 것은 이 상흔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철학과 정책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 서구의 보수 개념이라면 한국의 보수 개념은 망국, 분단과 전쟁, 독재와 저항의 기억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왔다. 미완의 근대가 생산한 이 기억의 주술에서 어떻게 풀려날지 그 해답은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보수’가‘진보’와 함께 한국 정치의 궤적을 어떻게 그려 나갈지는 이 방법을 누가 언제 어떻게 찾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