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라곤 ‘명예’뿐인 가난한 ‘국민 시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다
걱정과 불신으로 시작한 AI와의 공동창작 프로젝트에서 시인이 마주한 낯선 세계
《태어난 순간을 기억해?》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이 창작의 방식과 속도를 바꾸는 이 시대에 예술가의 삶과 창작의 의미를 서정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요즘 대두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과 관련된 논쟁을 모티브로 삼되, ‘문학작품의 창작 영역’에서 흥미로운 서사를 입혀 개성적인 작품을 만들어 냈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언어로 세계를 탐구해 온 시인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누구나 그녀의 이름이나 대표 시를 알 만큼 유명한 시인, 메리언 파머. ‘국민 시인’이라 불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흔다섯의 시인에게 특별한 제안을 담은 편지가 도착한다. 글로벌 IT 기업에서 ‘샬럿’이라는 AI와 일주일 동안 협업해서 시를 공동으로 창작해 달라는 제안이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 6만5천 달러라는 고액을 받을 수 있다. 사실 메리언은 시인으로서 쟁쟁한 명성과 달리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다. 오래전부터 시 창작에 몰두한 탓에 가족과의 관계도 평탄하지 못했다. 남편과는 예전에 갈라섰고, 외아들은 30대가 되어서도 연인과 집 한 채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어머니 노릇에 소홀했던 그녀는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와중에 들어온 ‘공동 시 창작 프로젝트’는 그녀가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제안이 된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공간에서 기계와 함께 시를 써야 하는 조건을 내켜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메리언의 모습에서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자신의 작업과 정체성을 ‘위협받고’ 있는 예술가를 떠올리게 된다. 자연스레 ‘인간과 기계의 대결’ 같은 구도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본심을 숨기고 방문한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작가는 인공지능 기술을 둘러싼 거대한 담론 대신, AI와 협업해야 하는 예술가의 복잡한 감정과 선택에 집중한다. 디스토피아적 상상에 기대기보다, 첨단 디지털 기술과 공존해야 하는 창작자의 감정과 윤리를 치밀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취가 돋보인다. 거장으로 인정받지만 타인과의 소통이 힘들었던 노시인과 시 창작의 기술과 지식은 겸비했지만 자아가 부재한 ‘샬럿’은 서로에게 뜻밖의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소설은 해외 유명한 언론에서도 “문학 창작의 양면성을 매혹적인 사유로 풀어낸 작품”, “새로운 기술에 위협받는 예술가를 따뜻하고 서정적으로 포착해 낸 소설”, “동시대 작품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 등으로 찬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