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처럼 슬픔처럼’ 다시 찾아온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
―11년의 침묵을 깬 최승자 신작 시집
저 격동의 80년대를 청춘의 이름으로 관통해온 이들에게 시인 최승자는 하나의 뜨거운 상징이자 처절한 분노였고 치명적인 중독이었다. 사물과 삶, 시대와 사건을 몸의 언어로 치환해 분석하고 해석하는 최승자의 거침없는 의식의 뿌리는 자기 부정과 자기혐오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자멸과 자폭으로 치닿는 최승자의 자기 모멸적 시언어는 오염된 세계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적의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의 몸이 그 한 이유였고 한편에는 70년대의 유신정권과 80년대의 군부 독재가 명확한 현실로 자리하고 있었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 최승자는 시대가 부숴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캐묻기 위해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고, 뛰고, 날고, 깨부수고, 울부짖고, 비명을 내지르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절망적으로 호소한다. 이어지는 시집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내 무덤, 푸르고』(1993)를 거치면서, 시간의 냉혹함 앞에서 당면한 세계에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부정으로 응수했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번뜩이는 시 속에서 최승자의 화자들은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자기 방기와 자기 파괴의 경계를 서성였다. 그러나 “이 극도의 의기소침은 최승자 특유의 지적이고 활달한 언어의 부력에 들려 시집 전체를 착잡한 생기의 공간”으로 만들었다(고종석).
이른바 황지우, 이성복, 김정환, 김혜순, 김승희 등과 함께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온 최승자의 시는 이전의 시에 대한 그리고 당대 사회에 대한 ‘전복’ 그 자체랄 수밖에 없었다. 기존 여성시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강렬한 개성, 고정된 이미지의 틀을 뛰어넘는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언어 구사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의 세계를 향해 내뱉는 저주와 치욕, 자기 부정, 자기 모멸감으로 가득 찬 위악의 몸부림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한동안 시인 최승자를 볼 수 없게 된다. 정확하게 말해 최승자가 시와 멀어진다.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에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최승자는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어떤 아침에는」, 『기억의 집』) 그만 길을 잃고 기나긴 잠의 나락으로 침잠해간다. 1999년에 시 40편을 엮은 『연인들』을 발표하며 “아주 긴 긴 시간 체험, 먼 공간 체험, 깊은 의식의 체험”을 통해 지독하리만치 ‘죽음’에 붙들려 왔던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긴 여행의 끝의 한 출발점”에 서 있다는 자신의 안부를 전해왔던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시인은 다시 시간과 공간, 의식의 체험 속으로 떠나는 더 멀고 먼 여행길에 오른다. “한 여자가 제 삶의/가로수 길을 다 걸어가/소실점 바깥으로”(「둥그런 거미줄」, 『연인들』) 사라지듯 그렇게 최승자는 우리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2010년, 등단한 지 꼬박 서른 해를 맞게 된 최승자가 지난 11년간 쓰고 일부는 발표했던 총 70편의 시를 묶은 여섯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길고 질긴 희망과 깊고 넓은 절망을 독하게 품었던 ‘우리들의 시인’의 새로운 귀환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번 시집에서 최승자는, 시간이라는 과거의 예속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문명과 시간, 역사와 제도가 부여한 질서 너머로 부상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와 황홀한 미지의 세계로 활짝 열린 초시간적, 우주적 사유로 넘실대고 있다.
평론가 박혜경의 지적처럼, 처절한 고통의 끝에서 정작 그 고통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혹은 끝 모를 절망의 늪에서 그 절망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는 것처럼, 시인은 잿빛으로 삭아가는 텅 빈 시간의 하늘 아래 마침내 자신의 삶과 시가 깃들 새로운 거처를 발견한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