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의 맥
나라가 무너졌다. 을사늑약에 이어 군대가 해체되었다. 나라로부터 아무 혜택을 받지 않은 몰락한 선비와 평민이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걸었다.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싸우지 않고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07년 장성의 선비 기삼연이 의기를 들었고, 나주의 맹장 김태원이 가세했으며, 임실의 지사 전해산이 달려왔다. 300여 청년들이 수연산에 모여 나라를 되찾자는 의기를 들었다. 1908년 설 날, 순창에 숨어 있던 기삼연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기삼연은 담양을 거쳐 서방을 지나 경양방죽을 지나 광주천 모래사장에서 붉은 피를 뿌렸다. 빛고을의 아낙들이 울었다. 의병의 깃발을 건네받은 김태원은 그해 4월 어등산에서 적탄에 숨을 거두었다. 이어 전해산은 함평과 영광의 산야를 비집고 다녔고, 심남일은 영암과 장흥의 산야를 뛰어다녔으며, 안규홍은 보성과 화순의 산과 바다를 뒤집고 다녔다. 전남의 산과 강이 핏물로 적셨다. 의병장들은 1910년 대구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한말 의병 싸움의 6할이 호남 의병이 일으킨 싸움이라고 한다. 왜 호남인은 아무 승산도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거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강자의 불의한 폭력에 무릎을 꿇지 못하는 기개가 왜 유독 호남 청년들에게 깊게 새겨져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1929년 11월 3일, 빛고을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싸움을 벌였다. 광주에서 타오른 이 불길은 경성을 거쳐 평양으로, 경흥을 거쳐 북간도로 번졌다. 350개 학교에서 5만 4천명의 학생이 궐기하였으니 ‘제2의 3·1운동’이었다. 다시는 이처럼 거국적인 투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다. 빛고을은, 호남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광주정신이란 무엇이냐? 광주정신의 역사와 특질에 대해 여러 논의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길이다.” 비문의 이 두 문장이 광주정신이다.
1907년, 고뇌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모두가 항일의 깃발을 들고, 총을 잡고 싸움에 나서고 있던 그때, 나라의 미래를 숙고하는 청년이 있었다. 왜 동양이 패망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야 서양의 발굽 아래에서 벗어나 부강한 자주 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방략을 찾아 나선 청년이 있었다. 송홍이었다. 그의 답은 명확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한학자 송홍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갈 줄 아는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가 선택한 것은 교단에 서는 일이었다. 교단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왜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가, 자주 국가를 세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토론했다. 하지만 교단을 지키는 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고백했다. “누군들 세상을 피해 산으로 돌아가 몸을 깨끗이 하고 자정(自靖)하고 싶지 않겠는가?”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교단에 섰다. 외로운 교직 생활이었다. 송홍은 지극한 원한을 품고도 아무 원한이 없는 듯이 교단을 지켰다.
송홍이 뿌린 민들레 홀씨는 〈성진회〉로 피어났다. 이어 〈성진회〉는 〈독서회〉로 확산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감옥에 간 80명의 학생, 퇴학을 당한 300여 명의 학생들은 이후 1930년대 전남독립운동의 나무가 되었다. 그들의 정신은 1960년 4·19학생혁명으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마침내 오월로 이어졌다. 독서회의 일원이었던 이기홍은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를 이끌었다. 이기홍은 광주 4·19학생혁명을 이끌었던 김시현을 지도하였고, 6·3 한일회담반대투쟁의 맹장들, 박석무와 전홍준을 이끌었으며, 함성의 주인공 김남주와 이강으로 하여금 역사의식을 갖도록 도왔다. 경찰서에 잡혀 온 화순 의병을 풀어준 청년이 있었다. 최흥종이다. 최흥종은 나라 찾는 길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신학교를 다녔고, 목회자가 되었다. 광주 YMCA를 설립하였다. 그는 그릇이 큰 목회자였다. 빛고을의 거지들을 교회로 오게 하여 밥을 함께 먹었다.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았다.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경성으로 데리고 진격하여 총독과 담판을 지었다. 대다수 목회자들이 신사참배의 강요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최흥종은 거절하였다. 이때 최흥종을 따른 젊은이가 있었으니 백영흠과 조아라였다.
백영흠은 꼿꼿한 선비였다. 1960년대 동부교회에서 빛고을의 문제아들이 백영흠으로부터 인문정신을 배웠다. 이후 윤영규를 필두로 한 동부교회 청년들은 K-민주의 소중한 거름이 되었다. 조아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비참한 여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약자를 보면 먼저 짠한 마음이 일고, 강자의 싸가지 없는 행패를 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광주정신’이다. 조아라는 광주정신을 몸소 실천한 여걸이었다. 광주를 예향이라고 한다. 살펴보니 그냥 예향이 아니었다. 동양화의 대가 허백련은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방 최흥종과 오두막을 짓고 함께 살면서 시대를 고민한 빛고을의 의인이었다.
그랬으니 부안의 독립투사 김철수 선생이 갈 곳 없으면 빛고을을 방문하였고, 춘설헌을 찾았다. 오지호는 누구인가? 그는 서양화의 개척자이자 빨치산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나이 들어 산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숯으로 목탄을 만들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어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렸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광주정신’의 소유자, 그가 오지호였다. 전남여고 1학년 학생이었던 천경자는 이 늠름한 화가를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김현승이라는 가난하고, 외롭고 맑은 시인이 있었다. 그를 흠모한 청년들이 그의 문학정신을 이어갔다. ‘이별은 너무 길다’면서 〈직녀에게〉를 노래한 문병란, 〈십자가여 광주여〉 부르짖으며 호곡한 김준태, 광주정신을 문학으로 끌어올린 『타오르는 강』의 문순태, 〈겨울공화국〉을 노래한 양성우가 모두 김현승의 제자이다. 이골 저골에서 흘러나온 ‘광주정신’의 냇물이 모이고 모여 1970년대의 광주를 흐르는 강이 되었다.
- 2025년 3월 26일
황광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