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일상화된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도 둘 이상의 재난이 연쇄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함으로써 그 피해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복합 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보편론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기후 위기, 기술의 급속한 발전, 인간성의 약화,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분열은 더 이상 개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징후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복합재난’의 근저에는 근대가 구축해 온 사유 방식과 삶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근대는 인간 해방과 진보라는 이름 아래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기와 파국의 조건을 축적해 왔다. 특히 인공지능을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의 삶에 편의를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의 노동과 판단 기능을 대체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위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다움이 어떠한 철학적 근거 위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다시 제기하며,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근대성의 빛과 그림자를 ‘재난’의 관점에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과 산업 자본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존재 가치는 점차 약화되고, 삶의 방향성 또한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재난’의 관점에서 성찰하고자 하였다. 기술과 자본이 결합하여 이윤 추구를 극대화할수록, 인간다움의 의미와 인간 존엄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철학적 과제로 부각된다. 이 책은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도출된 연구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