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상을 24조각으로 나누어 살다 간 천재 잠들다”
실소와 냉소의 변주, 그리고 지적 통쾌함까지
이소호 첫 장편소설 『이자만큼 성실하게』
“내가 당한 사기는 내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시인이 가져야 할 숙명적인 예민함이 치른 대가였다.”
2014년에 등단하여, 2018년에 제3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2022년 PEN America 문학상 번역 시 부문 롱리스트(tr. soje), 2025년 스톡홀름 국제시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 SF·근미래 노벨라를 써오던 이소호가 첫 오토픽션 장편으로 돌아왔다. 한 해에 시집·산문집·소설을 모두 내는 다장르 작가의, 가장 초현실적인 디스토피아. 이번 무대는 미래가 아니라 빚이다.
이 작품은 빚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린 한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며 통과하는지를 보여준다. SF가 사라진 자리에 빚이 들어왔고, 디스토피아 대신 현실이 등장했는데, 오히려 더 기괴하고 더 웃기다. 화자는 동정받는 인물이 아니다. 죽음마저 수금으로 쓰고, 가족에게 내미는 구조 요청을 119·112로 환산하며, 명품 매입을 잠입 미션으로 게임화하는 뻔뻔한 또라이다. 심지어 자신의 지독한 소비와 구질구질한 현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온 세상의 철학자와 논문까지 싹 끌고 와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전에 미리 읽은 다수의 독자가 주인공 수진을 불쌍해하는 대신 웃었다. 이번 작품은 삶이 우리를 궁지로 몰 때 언어와 유머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 보여주는 블랙코미디 소설이다.
신용카드는 내 인생의 화려한 개막을 알리는 또다른 신호탄이었다. 흰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퇴근하는 길, 나는 드디어 광고주에게서 내 조사를 되찾아온 개선장군이자,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승리자였다.
와, 나 진짜 개똑똑하네.
앞으로 나눠서 사면 되겠다.
집으로 돌아와 우아하게 노트북의 자판 위에 내 비극을 또박또박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시인들이랑은 다르게 살 거야.
그 노트북으로 쓴 첫 줄은 문학의 주춧돌이 아니었다.
내 무덤 위에 세울 화려한 비석의 첫 장이었다.
“여기, 세상을 24조각으로 나누어 살다 간 천재 잠들다.” (본문 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