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끝나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오락실 세대’ 작가 6명이 그려낸,
‘다시 하기’ 없는 현실 이야기 6편
〈갤러그〉 〈테트리스〉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레트로 게임을 테마로 단편소설 6편을 엮은 소설집 『계속하겠습니까?』가 출간됐다. 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되던 1980~90년대 오락실과 PC, 콘솔 게임을 소재로, 우리 시대의 작가 김혜나·서동원·정명섭·정진영·차무진·최유안이 각자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모두가 겪는 실패·재시작·관계중독·불안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때 그 게임에 인생을 겹쳐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게임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아, 상상 가능한 행복과 불행의 양극단으로 보여주며 재미를 이끌어낸다. 물론 ‘계속하겠습니까(Continue?)’ 버튼 클릭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게임과, 실패하고 무너져도 틀림없이 계속되는 삶은 다르다. 더 큰 댓가와 비용을 치러야 하고,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 시작하기’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한번쯤 마음 같지 않은 삶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할 기회를 바란다.
레트로게임 앤솔로지 『계속하겠습니까?』는 시간 여행이나 타임 루프 같은 설정으로 그런 꿈을 이뤄주는 SF 장르의 소설집은 아니다. 하지만 게임은 삶을 들여다보고 비추는 매개가 된다. 그 시절 저마다 좋아하던 게임 위주로 먼저 보든, 수록 순서대로 보든 『계속하겠습니까?』를 읽다 보면 왜 우리가 게임에 빠져들고, 그 기억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떻게 남았는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런 작가들의 생각도 매 작품 끝 작가노트에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게임에 몰입하고 중독된다. 누군가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 그래서 때로는 집착의 대상이다. 스스로의 결핍과 불안,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상대적 박탈감을 쏟아붓는 ‘쓰레기통’이 되고 일쑤다.
김혜나 작가의 「블렌딩」에서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에 빠져있던 ‘나’는 일상에서도 집착과 중독, 도피를 반복한다. 게임이든 사람이든 그때그때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뿐 곧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커피에 빠져 바리스타가 되었다가 다시 숨어든 나는, 한때 ‘돌연변이 커피콩’으로 버려지던 반쪽 짜리 커피콩 ‘피베리(Peberry)’의 진한 맛을 곱씹으며 스스로에 대해 깨닫는다. 아마도 작가노트의 “사람이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게 마련이나, 이번에는 빈자리를 가만히 그러안고 소설을 써나갔다”는 대목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서동원 작가는 「거품이 터지는 순간」에서 부담과 좌절감이 임계점에 달한 주인공이 무너지는 과정을 게임 〈보글보글〉의 거품에 빗대 보여준다. 어려서는 부모, 직장에선 상사에게서 제대로 된 ‘거품’을 만들라고 강요 받아온 ‘나’는 어느 순간 현실과 게임을 혼동한다. 현실을 뒤집을 제안, 스카우트 제의에 나는 인내심을 잃고 폭주한다. 하지만 〈보글보글〉 100판을 마치면 나오는 메시지(‘BUT IT WAS NOT A TRUE ENDING!’)처럼, 이건 끝이 아니었고 기어이 ‘거품이 터진’다. 작가는 열린 결말을 강조하며 “거품이 터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이 ‘불행’으로 단정되지 않길 바라봅니다. 거품은 다시 쏘면 되니까요”라고 덧붙인다.
그런가 하면 게임은 시간과 세대를 넘어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정명섭 작가의 「256」에서는 게임 〈갤러그〉가 서먹서먹한 아빠-아들 사이를 회복하는 실마리가 된다. 결혼과 사업 모두 실패하고 아파트 경비로 일하는 우혁은, 아내의 갑작스런 암 수술로 중학생 아들 민준을 떠맡는다. 서먹서먹한 둘 사이를 〈갤러그〉가 잇는다. 우혁은 〈갤러그〉의 버그인 256판째 ‘오버 플로’를 아들에게 알려주고, 〈갤러그〉로 친구들의 관심을 끌며 신이 난 민준은 우혁처럼 ‘막판 깨기’에 도전한다. ‘갤러그의 세상 속에서만 승리자’로 어린 시절을 견뎠던 우혁과, 아빠에게서 ‘그 시절을 이긴 힘’을 이해하게 된 아들 민준의 경험이 겹쳐진다.
또 정진영 작가의 「집으로(close to home)」에서는 게임 〈대항해시대 2〉를 통해 주인공이 실종된 동생과 만난다. 상속받은 반지하 빌라를 처분하러 온 ‘나’는 오랜만에 켠 옛날 컴퓨터에서 좋아했던 게임 〈대항해시대 2〉를 실행한다. 오래 전 사라진 동생의 게임 세이브 파일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거친 사춘기 끝에 집을 나간 동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실종된 동생이나 이혼한 아내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작가노트에도 “그때 내가 동생을 덜 미워하고 감싸줬다면 어땠을까. 즐기던 게임을 동생에게 넘기고 옆에서 훈수를 뒀다면 어땠을까. 그런 마음을 이 소설에 담았다”며 작가는 아쉬움을 남겼다.
차무진 작가의 「싱크로니시티」에서는 황폐하고 무기력한 주인공의 내면이 게임 〈악마성 드라큘라〉와 겹친다. 사업 부도 후 사라진 아버지, 이후 닥치는 대로 일하다 사고로 세상을 뜬 어머니, 해외 취업사기로 행방불명된 동생까지…… 철저히 혼자가 된 봉구는 주인 없는 집에 몰래 머물며 자살을 계획한다.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꽤 괜찮은 여자 서윤이 찾아오고, 집 앞의 버려진 트렁크에서는 게임 〈악마성 드라큘라〉 CD가 나오고, 또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는 집 나간 아버지까지 만난다. 제목이기도 한 ‘동시성’으로 이를 설명하던 작가는 “죽음을 하루하루 미루는 것, 그것이 삶이다. …… 그래서 구원은 셀프”라고 강조한다.
게임 〈테트리스〉가 소재인, 최유안 작가의 「모르는 세계」에서는 랜덤하게 떨어지는 블록(테트로미노)처럼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그린다. 빠듯한 유학 생활을 아등바등 뉴욕에서 모스크바로 이어가는 향, 가정불화로 부모에게서 버려지고 뉴욕에서 불법체류하는 로, 그들과는 달리 부유하지만 목표 없이 방황하며 향과 로를 스쳐가는 유학생 장까지 세 사람의 이야기다. 이들의 사랑조차도 무작위로 쏟아지는 테트로미노처럼 건조하게 묘사된다. 작가는 “테트리스처럼 급속히 겹을 쌓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잊은 게임 속 상태. 자본주의와 불균형,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부연했다.
이번 앤솔로지를 기획한 정진영 작가는 “80~90년대 콘솔·컴퓨터 게임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서 당시 청소년의 사고방식과 취향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컴퓨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첫 세대가 됐다”며 “게임이 대한민국 사회에 무엇을 남겼고, 과거와 현재가 게임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만나 미래로 이어지고 있을까”하는 질문이 책의 시작이었다고 밝혔다. 『계속하겠습니까?』는 단순한 오락거리로서의 게임을 넘어, 그 시절을 비춰내는 또다른 시각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