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저기, 제스.
만약, 만약에 제가 언젠가……, 사라지면요.
가끔이라도 절 떠올려주실 거예요?
하얀 엘프의 들판을 방문한 아렌, 그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온 제스와 마주하게 된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 고심하던 제스는 아렌과 마주한 순간 고민을 접어둔 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한다. 자신의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고.
한편 ‘붉은 연꽃’에 대한 조사를 멈추지 않았던 아렌은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그는 그동안 아렌이 믿고 따르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설상가상, 그는 아렐이 베이판의 공녀라는 것조차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렐은 마법에 걸려 기억을 잃어버리는데…….
※ 해당 개정판은 2014년 6월 출간된 ‘공녀님! 공녀님!’ 종이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eBook으로, 외전 ‘레아의 일기’(9권)가 추가되었습니다.
2. 작가 소개
박희영
‘도토루모카’라는 필명으로 조아라에서 활동 중입니다. 처녀작이 종이책으로 나오다니 기쁘고 설레면서 걱정도 됩니다. 2년 전의 제가 책을 낸다는 생각으로, 그때의 느낌은 유지하되 많이 보강하고 고쳤습니다. 마지막장을 넘길 때까지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doutormocha
▣ 출간작
할퀴어 주겠어!
공녀님! 공녀님!
11살, 23살
▣ 출간 예정작
악하소서
3. 미리 보기
“제스. 여기까지 왔으니 탁 터놓고 물어보죠. 여행 오기 전에 저한테 왜 그렇게 이상하게 굴었어요?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
“말해줄 생각이 없나 보네요. 그럼 저와 내기하는 게 어때요? 종목은 승마, 제가 이기면 제스가 요즘 왜 이상했는지 말해줘요.”
“싫다.”
아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스가 짧게 툭 던지듯 말하고 휙 돌아섰다. 또 피하는 거야? 원망스런 눈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렌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보내기엔 시간이 아깝다고요. 언제까지 옆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끝말은 안개 낀 양 흐릿흐릿했지만 제스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그가 미간을 한껏 좁힌 채 몸을 반쯤 돌렸다. 아렌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지?”
“아? 아.”
“언제까지 옆에 있을지 모른다고?”
“아녜요. 그런 말 안 했어요. 제스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이런, 카일의 말을 신경 쓰고 있어선지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아렌은 아차 하며 어물쩍 웃으며 넘기려 했으나 제스의 양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잠시 후 제스가 발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을 휙 스치면서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내기, 받아들이겠다.”
아렌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는 이미 말 앞에 서서 고삐와 갈기를 잡고 있었다.
“두말 마라.”
아렌은 아무 말 없이 제스가 말에 오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럭저럭’이라고 하기엔 그의 기좌는 너무나 안정적이었다. 머리선, 허리선, 발뒤꿈치 끝선 삼선이 훌륭하게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아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길, 저 인간은 승마도 잘하는 거냐. 하긴 이쯤 되면 제스가 못하는 게 있다고 하면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도 승마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아렌도 왼발로 등자를 딛고 땅을 힘차게 차서 올라섰다. 제스가 먼저 말을 몰아 앞서 나가자 그를 뒤따라 말의 배를 자극해 박차를 가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의 잔디가 바람에 낭창낭창하게 휩쓸렸다. 제스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서서 아렌이 제스를 바라봤다.
“제가 이기면 제스가 요즘에 왜 이상했는지 알려주는 거예요. 제스는 뭘 원해요?”
“내가 할 질문에 답해라.”
가슴이 뜨끔했다.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거지? 아렌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기를 무를까 생각하는 사이 제스가 팔을 들어 저 멀리를 가리켰다.
“저기 큰 나무까지가 승부다.”
아렌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상체에 있는 모든 힘을 발뒤꿈치로 내려 보내듯 편안히 앉았다. 제스의 왼팔은 아직 다 낫지 않았다. 거기에라도 희망을 걸어보자. 출발선을 맞춰 말을 몰고 간 아렌이 자세를 낮추었다.
“내가 셀게요. 셋, 둘, 하나……! 이런!”
‘하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제스는 단숨에 말을 몰아 아렌을 앞질렀다. 오른팔만으로 고삐를 쥐고 있는데도 단숨에 최고 속도.
왜 저렇게 빨라! 미친 거 아냐?
아렌은 곧장 속도를 늘리기 위해 박차를 넣으며 신체를 신축성 있게 움직였다. 아렌이 타고 있는 말 또한 속도가 점점 높아졌다. 조금 더. 조금 더 빨리. 아렌은 엉덩이를 서서히 들며 상체를 낮추며 균형을 유지했다.
따가닥, 따가닥.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가 우다다 하고 묵직한 굉음으로 바뀌었다. 말이 최대한도의 속도에 다다르자 바람이 볼을 찢고 지나갈 정도로 세게 부딪쳐 왔다. 말의 양다리가 함께 접근했다가 떨어져서 벌어지는 감각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그에 맞춰 아렌은 최대한 충격을 흡수하면서 발목을 부드럽게 유지했다. 그녀의 능숙하고 안정적인 균형과 기술이 말의 최고 속도와 맞물려 점차 제스의 뒤에 가까이 따라붙었다.
4미터, 3미터, 2미터, 조금만 더! 거의 따라잡았을 무렵, 제스가 먼저 결승선으로 점찍어뒀던 나무를 쌩 지나쳤다. 그로부터 1초도 지나지 않아 아렌도 결승선을 넘었다.
제스는 재빨리 고삐를 당기며 감속시켰고, 아렌 또한 같은 리듬으로 말을 제어했다. 아렌이 아쉬운 눈으로 결승선 나무를 돌아보며 탄식을 뱉어냈다.
“으아, 아쉬워……. 거의 다 따라잡았는데!”
제스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아렌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조금만 결승선을 멀리 잡았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활부터 시작해서 승마까지. 보면 볼수록 희한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다.
아렌은 고삐를 틀어쥐면서 한쪽 손을 내어 자신의 종아리를 문질렀다. 오랜만에 탄 데다 단숨에 최고 속도까지 올렸더니 다리 안쪽이 지끈거렸다.
제스는 말을 몰아 아렌 가까이에 접근했다. 말을 탔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멀쩡한 얼굴이었다. 아렌이 고삐를 살짝 잡아당기며 긴장 어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질문을 할 건데요?”
“…….”
무슨 질문을 할 거기에, 저런 심각한 표정일까. 설마 어제 남장을 정말로 눈치 챈 건 아니겠지?
그녀가 전전긍긍해하는 사이 제스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고 있었다. 물어볼 것이야 많았다. 남장을 푼 모습으로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쌓이고 쌓였다. 헌데 그중 어느 것 하나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요구하고 있었으나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질문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그와 그녀 사이에 존재하던 무언가가 깨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걸 깨고 싶은가? 스스로가 물었다. 그리고 그 답을 스스로가 내었다.
“조금 전에 했던 그 말.”
“예?”
아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제스의 눈동자 위로 섬광 같은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그 말, 무슨 뜻인지 설명하란 말이다.”
“그거, 정말 별 뜻 없었습니다만…….”
“조금 전 너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
“헤어짐을 전제로 했으니 이유 또한 존재하겠지. 내기를 했고, 너는 졌다. 솔직히 말해라.”
그의 말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단호했다. 제스가 왜 저럴까,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아렌은 이마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아, 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우선 제스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당장 혼인 얘기도 나오는데 공작이 될 수도 있고…….”
“…….”
“저도 언제까지고 기사단에 있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또 알아요? 제가 너무 재능이 이것저것 많아서 옆 나라에서 스카우트해 갈지……. 아하하! 어쨌든 지금이야 함께 있지만,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모른다는 말이었어요. 아까 말했듯이 사람 일은 누구도 예측불허니까요…….”
“단지 그뿐인가.”
“네. 하지만 저기, 제스. 만약, 만약에 제가 언젠가……, 사라지면요. 가끔이라도 절 떠올려주실 거예요?”
제스가 우뚝, 말을 멈춰 세우더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대로 아렌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괜히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