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하고 싶었던 말은 단 하나니까.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
제스에게 자신에 대해 고백한 순간 베이판으로 소환되어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간 아렌, 아니 아르렐리아. 우연히 만난 세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세이가 바로 그녀의 약혼자 세이모어 공작이었다는 사실은 아렌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제스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공녀의 신분으로 하일렌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제스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한편, 아렌을 살려둔 대가로 세이는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데…….
※ 해당 개정판은 2014년 6월 출간된 ‘공녀님! 공녀님!’ 종이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eBook으로, 외전 ‘레아의 일기’(9권)가 추가되었습니다.
2. 작가 소개
박희영
‘도토루모카’라는 필명으로 조아라에서 활동 중입니다. 처녀작이 종이책으로 나오다니 기쁘고 설레면서 걱정도 됩니다. 2년 전의 제가 책을 낸다는 생각으로, 그때의 느낌은 유지하되 많이 보강하고 고쳤습니다. 마지막장을 넘길 때까지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doutormocha
▣ 출간작
할퀴어 주겠어!
공녀님! 공녀님!
11살, 23살
▣ 출간 예정작
악하소서
3. 미리 보기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세이모어 공작으로 보일 법한 사람을 찾았다. 검은 머리를 한데 묶어 늘어뜨린 저 남자일까? 아니면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나에게 말을 걸 기회를 엿보는 저 남자일까?
아렌은 천천히 몸을 기울여 턱을 괴었다. 집 밖으로 한 발짝 나오지 않다 처음으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니 흥, 얼마나 힘을 주고 나왔을까? 어디 숨어 있어, 세이모어 공작. 어서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아주 그냥 자근자근 밟아주겠어…….”
“누굴 말입니까?”
“누구긴 누구예요. 당연히…….”
절로 말이 멈췄다. 주위가 환해질 정도로 은은한 은청발이 사락거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앵두처럼 작고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세이?”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렌. 아니, 아르렐리아 공녀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아렌을 담은 검은 눈이 엷은 웃음기를 띠며 곱게 휘어졌다. 입가에 머무는 은은한 미소, 작은 움직임 하나마다 깃든 우아함을 맴을 돌듯 응시하던 은빛 눈동자가 이내 그와 마주친다. 처음은 하일렌에서 만났다. 그다음엔 마계, 그리고 마지막은 이곳, 베이판?
“어……떻게?”
아렌은 자신을 향해 해석할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세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너무도 뜻밖의 자리에서 만난 터라 자신이 줄곧 세이를 만나면 해주리라 생각했던 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마침 왈츠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렌은 그의 손을 맞잡기는커녕 한 움큼의 숨결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세이는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의 손에 들린 잔을 들어 옆에 두었다. 뺨을 훑듯 지나친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일으켰다.
“언제까지 그리 넋 놓고 계실 겁니까? 혹 발을 헛디뎌 넘어지신대도 잡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나직한 속삭임이 귓전을 두드리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렌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사방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을 향해 있는데, 이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니.
“잡으십시오.”
“에?”
아, 멍청한 소리를 내버렸다. 입을 다문 순간 세이가 먼저 스텝을 옮겼다.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에 맞춰 앞뒤로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아렌은 얼결에 어깨에 손을 올리고 걸음을 뗐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의 춤을 따라 추다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발견하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이……. 나한테 설명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요.”
직각으로 홱 도는 타이밍에 맞춰 아렌이 그의 발을 콱 밟으려 했다. 하지만 세이는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1센티미터 차이로 발을 슥 빼내서 피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특유의 온화한 미소가 지금은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렌은 이를 으득 갈며 다시 직각으로 돌 때 그의 발을 향해 있는 힘껏 걸음을 내디뎠다.
“그건 세이가 더 잘 알 텐데요!”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다시 한 번, 그가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모르겠습니다.”
몰래 훔쳐보던 여인들이 단박에 쓰러질 만한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렌의 눈엔 점점 더 가증스러워 보일 따름이라, 그녀의 눈매가 자연히 찌푸려지며 접혔다. 그래, 이제껏 그에게는 돌려 말해서 제대로 들어먹힌 적이 없었다.
“세이가 강제로 마법을 써서 날 이곳에 데려다 놨잖아요!”
“아, 그것 말입니까?”
“……그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지 말아줄래요? 난 지금에라도 주변의 시선 신경 안 쓰고 그 잘난 얼굴에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뿐이거든요.”
아렌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완전히 돌았다가 세이의 품으로 돌아왔다. 등에 자리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은근하게 몸을 바싹 당겼다.
“못 본 사이 많이 성숙해지셨습니다.”
그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맴도는 왈츠에 사르르 녹아들듯 흩어졌다. 깊은 애정을 담은 눈동자는 그녀의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각인시키려는 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햇살처럼 생생한 은발과 장밋빛 뺨, 어깨까지 유려하게 떨어지는 목선까지.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아렌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래를 향했다가 돌아온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생각이 많아지셨습니다.”
“…….”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기에 그리도 답답한 눈빛을 하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거짓말.”
세이의 단호한 말이 끝나자 아렌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기엔 그는 너무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답답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착잡한 것이었다. 원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데다 실질적으로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없으니까.
아렌은 잠시 시간을 끈 후에 침묵을 깼다.
“……세이가 잘못한 게 뭔지 알고는 있는 거예요?”
“아렌이 화난 부분은 어떤 건지 알고는 있습니다.”
곧 죽어도 잘못했다고는 안 하지. 아렌은 왈칵 화를 내려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안 된다, 최대한 냉정하게 대응하자.
“세이는 내가 화내기를 바라지 않을 거고요.”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하는 부탁을 꼭 들어줘요. 세이가 저지른 잘못을 제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퉁 치는 거예요. 어때요?”
또박또박 이어가는 아렌의 말에 세이가 포옹을 풀며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자칫 음산해 보일 수 있는 새카만 눈동자가 저렇듯 투명하게 반짝일 때면 아렌은 속으로 의심을 품었다. 그가 정말로 피에 광분한다는 마족의 황제인가. 오히려 이미지는 천사에 가까운 듯한데……. 그녀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 숨기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마저 스텝을 옮겼다.
“제 정인(情人)인 척해줘요. 세이모어 공작 앞에서.”
세이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해갔다. 입가에 서서히 떠오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아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웃음을 잘 참지 못해도 그렇지, 지금 그는 진심으로 재밌어하고 있고 그걸 숨기려는 어떠한 노력조차 보이질 않았다. 이런,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아렌은 침착하게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세이. 저번에 말한 적 있죠? 베이판에 있다는 약혼자, 그 사람이 처음으로 이 자리에 온대요. 음침한 자식, 이제껏 어디 틀어박혀 있다 내가 나간다니 나오는 건지……. 틀림없이 더러운 꿍꿍이를 가진 게 틀림없어요.”
“…….”
“아니, 대체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세이, 난 심각해요.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그 거머리를 떼어내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날 조금만 도와줘요. 소문이야 뒤따르겠지만 금방 사라질 거니까요, 네?”
자신의 애탄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만 같아 아렌이 갈수록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고 낮게 웃고만 있던 세이는 왈츠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에 따라 어깨에 얹혀 있던 손이 허공에 머물렀고, 이내 느릿하게 내려갔다.
“……무리한 부탁인가요?”
아렌은 답답한 마음에 자신 없는 말을 내뱉었다. 여음(餘音)에 묻힐 만큼 나직한 속삭임이었으나 세이가 그를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왜일까, 그라면 흔쾌히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았는데. 당혹감에 아렌의 얼굴이 굳었고, 그런데도 입술 한번 들썩이지 않는 세이의 모습은 그녀에게 팽팽하게 맞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렌은 세이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하다 불현듯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세이의 마음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토록 노골적인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연심을 품은 사람에게 자신은 정인인 ‘척’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무리 세이모어 공작을 떼어내는 데 온 정신이 팔려도 그렇지, 이 무슨 배려 없는 행동이란 말인가. 아무리 세이의 행동과 퉁 치자고는 했으나 과했다.
“미안해요, 세이. 없던 얘기로 해요.”
아렌은 재빨리 표정을 펴서 그렇게 말하고 뒤돌았다. 그때, 그녀의 등을 향해 익숙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아르렐리아! 여기 있었구나, 마침 세이모어 공작도 함께 있었구려. 오랜만이오.”
아렌이 도로 홱 돌아본 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레이나스 공작이 세이모어 공작이라고 칭하며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세이였다. 세상이 핑그르르 도는 느낌이었다. 열병에 사로잡힌 듯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아르렐리아, 뭘 하고 서 있느냐. 어서 이리 와서 공작과 인사 나누지 않고.”
아렌은 입술을 꾹 깨물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고 가슴은 터질 듯이 뛰었다.
“……세이……모어……, 공작이라고요?”
느릿하게 끊어지는 말끝에 아렌은 얼이 나간 채 세이를 응시했다. 마치 신기루라도 보는 듯한, 꿈이라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라고 말해요, 세이. 제발 아니라고…….
“반갑습니다, 아르렐리아 공녀님.”
쐐기를 박듯, 세이가 목례를 하며 예의를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