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이 무더위를 흩어주면 좋으련만, 북상하는 태풍마다 야속하게 중국 방향으로 꺾여 나간다. 그 탓에 이웃 나라는 무더위와 태풍 피해로 올해도 어김없이 극심한 물난리를 겪고 있다. 화면 너머 서울은 연일 13일째 폭염 경보를 울려대고 있다는 뉴스가 쉴 새 없이 보도된다.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이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현실은 숨이 막히는 찜통더위지만, 상상 속에서나마 책을 통해 만주 벌판의 칼바람과 한겨울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방 안의 꼴을 본 아들 경호가 기겁하며 한마디를 던진다. “아버지, 제발 내의라도 좀 걸치고 일을 하세요. 집안 꼴이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돼지우리도 이것보단 깨끗하겠어요.” 젊은이들조차 더위에 늘어져 축 처진 갈대마냥 흐느적거리는 서글픈 계절이다.
이십여 일 전, 불현듯 아주 저렴하게 나온 태국행 비행기 티켓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에게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덜컥 세 장의 티켓을 예매해 버렸다. 차라리 태국은 하루에 한두 번 시원한 스콜이라도 내리지, 지금의 한국은 소나기 한 자락조차 허락지 않는다. 강물은 메말라가고 비는 내리지 않으며, 작열하는 태양은 대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듯 녹여내고 있다. 그래, 차라리 태국으로 가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독자분들은 내가 무슨 엄청난 부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실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한 달을 버티는 비용보다 태국에서 한 달을 살아내는 경비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극빈자가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방편이자, 장모님이 계신 곳으로 피서 겸 도망을 치는 셈이다. 예전 우리 어머니 세대가 얇은 주머니에 억지로 버스비를 쥐어주며 ‘외갓집에 가서 한 달만 지내다 오라’고 등을 떠밀던 그 아련한 심정을, 이제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하겠다.
그나저나 당장 8일 비행기를 타려면 이 원고를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 땀은 줄줄 흐르고 눈은 핏발이 선 채 벌게져 있다. 도대체 며칠째 이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가. 남들은 열대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불평한다. 내게는 참으로 배부른 소리다. 나는 눈만 감으면 피곤에 지쳐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눕기만 해도 만신창이가 된 허리가 끊어질 듯 끊임없이 비명을 지른다. 대학 시절, 15시간씩 꼬박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할 때도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다. 이제는 야속하게도 체력이 받쳐주지를 않는다. 오직 일생일대의 소망이자 마스터플랜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정신을 붙들고 버틸 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만약 제가 이 대작을 집필한 작가라면 말입니다…….” 창피한 노릇이다. 고작 10권짜리 시리즈가 무슨 대작이란 말인가. 아직 인류문명사의 본류는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고, 그저 맛보기로 써 내려가는 이 책이 무슨 대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겠는가. 가야 할 길은 까마득하게 먼데, 서산의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심정. 지금 내가 처한 절박한 처지가 딱 이와 같다.
철없는 아들이 지나가듯 툭 내뱉는다. 자기는 인생을 대충 즐기며 살 거란다. 나는 그 말에 더 이상 깊은 잔소리를 얹지 않았다. 내가 핏대를 세워 훈계한다고 해서 들을 나이도 아니거늘, 그저 삶의 무게를 스스로 느끼고 깨우쳐 갈 뿐이다.
나는 이번 책을 통해 독자분들의 가슴속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메시지를 명확히 심어놓고 싶다.
1.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독사(毒蛇)'가 되어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영웅들(우구내, 핵리발, 아골타)은 도덕책에 나오는 선량하고 무결한 성인군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냉혹한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자식을 인질이나 미끼로 과감히 던지고, 이간질을 일삼으며, 방심한 적의 목덜미를 가차 없이 물어뜯는 잔혹한 지략가들입니다. 나는 인간의 가장 날것 그대로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거대하고 포악한 포식자(거란) 앞에서 어설픈 정의감이나 나약한 착함은, 가문과 부족의 참혹한 멸망을 의미할 뿐입니다. 핵리발이 오국부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거란 관리의 목을 베게 만든 그 지독한 모략은, 결코 개인의 잔인함이 아니었습니다. 내 소중한 백성들과 내 품의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한 대추장으로서의 피눈물 나는 책임감이었습니다. 인생이라는 냉혹한 정글에서 내 사람과 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때로는 착함을 과감히 버리고 지독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거대한 거악(巨惡)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서슬 퍼런 칼날과 맹독을 품는 행위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웅들이 짊어져야 했던 서글프고도 위대한 책임감의 본질입니다.
2. "피눈물 나는 '양보와 연대'만이 거대한 기적을 만든다"
역사상 수많은 강소기업이나 가문, 심지어 거대한 국가들조차 정상의 문턱에서 '내부 분열'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곤 했습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제가 가장 공들여 쓴 핵심 장면은 바로 장남 핵자의 위대한 양보와 차남 핵리발의 대포용입니다. 장남 핵자는 자신의 알코올 중독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담담히 인정하고, 75만 체급이라는 완안부의 거대한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 동생에게 보위를 '양보'합니다. 보위에 오른 핵리발은 형을 숙청하는 흔한 권력자의 길을 걷는 대신, 그를 친위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최고의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나아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사촌 동생들의 목숨을 살려주며 “내게 피 값을 빚지게 만들 테니, 거란의 목을 베는 날 최선봉에 서라”고 포효합니다. 거대한 대제국 거란을 끝내 무너뜨린 진짜 힘은 강력한 철갑기병이 아니었습니다. 가문 내부에서 보여준 '피눈물 나는 연대와 포용'이었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조직은 결코 천하로 비상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단단한 방패가 되어줄 때, 비로소 대제국의 기적이 시작되는 법입니다.
독자 여러분, 저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먼지 쌓인 11세기의 북방 전쟁사를 지루하게 복원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혹했던 영하 30도의 겨울,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채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힘을 응축해야 했던 완안부 영웅들의 터질 듯한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살기 위해 치욕스럽게 머리를 숙여야 했던 굴욕의 밤, 그리고 그 굴욕을 끝내 명분이라는 날카로운 칼로 바꾸어 낸 위대한 지략의 순간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여러분의 가슴속에도 거대한 바위를 단칼에 부수고 일어설 완안부의 시퍼런 철검 한 자루가 힘차게 돋아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6년 8월 7일. 통혜(通惠) 유승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