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끝내 제거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에 더 가깝다. 사랑했기 때문에 쓸쓸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쓸쓸하며,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쓸쓸하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무언가를 잃고, 밀려나고, 늙어가며, 어떤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이동한다. 중요한 것은 그 쓸쓸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상실된 상태의 존재들을 별이라고 부른다.
이 명명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다. 반짝이는 법을 잃어버린 존재를 다시 ‘별’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은 빛을 잃었을 뿐, 별이라는 이름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서랍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더라도 언젠가 다시 푸른 날개를 펼 가능성 역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별을 쓸쓸이라 부른다』에서 ‘쓸쓸’은 허무의 다른 이름이라기보다는 사라져가는 존재를 끝까지 ‘바라보려는’ 인간적 시선이 만들어낸 새로운 존재의 호명이다.
시인은 화려한 중심보다 오래된 골목을 보고, 높은 곳보다 바닥을 보며, 건강한 몸보다 병든 몸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동물을 보고, 동물에게서 사람을 보며, 낡은 사물 속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의 시간을 읽는다. 이러한 시선 속에서 서로 아무 관계가 없어 보였던 존재들이 잠시 하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 김춘식(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