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도 길이 있다. 사람을 따라 국경을 넘고, 언어를 바꾸고, 때로는 종교와 민족의 경계마저 넘어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여행한 이야기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이름과 모습을 얻고, 어느 순간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우리의 옛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해서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를 생각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토끼전』과 『심청전』, 『고려장 이야기』, 『두껍전』과 『옹고집전』 같은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를 담은 이야기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불교미술과 불교 문헌을 연구하면서 뜻밖에도 오래전 인도에서 전해지던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속에서 이들과 닮은 이야기들을 하나둘 만나게 되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흔히 ‘본생담(本生譚)’이라 부른다. 석가모니가 부처를 이루기 이전 수많은 생을 거듭하면서 때로는 왕으로, 때로는 수행자로, 때로는 사슴이나 코끼리, 원숭이와 같은 동물로 태어나 보살행을 실천했던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에는 보시와 인욕, 자비와 효, 지혜와 희생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러나 본생담을 읽다 보면 그것이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적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던 사회와 자연환경, 인간관계와 윤리, 그리고 여러 지역을 오가던 오래된 이야기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본생담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이야기도 함께 길을 떠났다. 팔리어로 전승된 본생담과 산스크리트계 문헌, 그리고 『현우경』·『육도집경』 등을 비롯한 한역 불전의 본생담은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다. 번역되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일부가 선택되기도 하고, 새로운 지역의 환경과 문화가 더해지기도 하였다. 내가 본생담을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한 타임캡슐’처럼 생각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역 본생담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야기가 이동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문화, 그리고 각 시대가 불교에 요구했던 가치가 함께 들어 있다.
이야기의 이동은 문헌에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본생담은 글로 읽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림으로 읽는 이야기였다. 인도의 스투파와 간다라의 부조, 쿠차의 키질석굴과 돈황 막고굴의 벽면에는 수많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남아 있다. 비릉갈리왕이 바른 법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몸에 천 개의 쇠못을 박도록 허락하는 이야기는 『현우경』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키질석굴 38굴과 돈황 막고굴 257굴, 그리고 훨씬 뒤인 북송 시대의 개화사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한 이야기가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다른 지역의 벽면에 반복하여 그려졌다는 사실은 본생담이 얼마나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동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의 내용만큼이나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도의 이야기는 어떻게 중앙아시아의 석굴 벽화가 되었을까? 페르시아의 상인과 인도의 불교도는 어떤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을까? 팔리어로 전해진 이야기는 한역 불전에서 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이동한 이야기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떻게 한반도에까지 도달하여 우리의 설화와 고전문학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2022년 한 해 동안 《현대불교》에 「조성금의 스토리텔링-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나는 스물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았다. 당시에는 한 편 한 편의 본생담과 관련된 불교미술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만, 연재를 마치고 전체를 다시 바라보니 각각의 이야기 사이에 하나의 긴 길이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본생담의 형성과 이동, 그리고 변용의 길이었다. 이에 이 책에서는 연재 당시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물세 편을 ‘원형·이동·변용’이라는 세 개의 흐름으로 다시 엮었다.
제1부 ‘원형’에서는 인도에서 전해진 본생담을 중심으로 부처가 되기 이전 보살이 어떠한 삶을 살았다고 기억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제2부 ‘이동’에서는 본생담이 불교의 전파와 함께 인도를 떠나 이동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제3부 ‘변용’에서는 그렇게 이동한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 특히 한국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 옛이야기의 기원을 모두 불교 본생담에서 찾으려는 책은 아니다. 두 이야기가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문자로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비슷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삶 속에서 서로 관계없이 유사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원’보다는 ‘전승과 변용’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어느 문화에서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가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면서 어떻게 번역되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다른 이야기와 만나며, 마침내 새로운 문화의 기억이 되어가는지를 살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