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화가 이중섭을 둘러싼 70년의 신화를 뒤집다**
이중섭 탄생 110주년·사망 70주년,미술사학자 윤범모가 다시 묻는다.우리가 사랑해 온 ‘천재 이중섭’은 과연 진짜 이중섭인가.
신화를 벗기자, ‘화공 대향’이 보였다
비운의 천재도, 순애보의 주인공도 아닌그림으로 시대를 견딘 한 인간 이중섭의 실체
“천재 이중섭은 없다.”
황소를 그린 국민화가, 담뱃갑 은지에 그림을 그린 가난한 천재,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한 순애보의 주인공,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 마흔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예술가. 우리는 오랫동안 이중섭을 이렇게 기억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중섭은 어디까지가 실제의 이중섭이고, 어디서부터 후대가 만들어낸 ‘신화’일까.
이중섭 탄생 110주년이자 사망 70주년인 2026년, 미술사학자 윤범모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가장 강력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이중섭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이중섭 신화, 거꾸로 보기』는 이중섭의 명성을 부정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천재’, ‘귀재’, ‘국민화가’, ‘비운의 예술가’라는 찬란한 수식어 뒤에 가려진 진짜 이중섭을 복원하려는 책이다.
저자는 이중섭이 스스로를 ‘화공?工’이라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천재라기보다, 오산학교에서의 교육과 평양의 문화적 토양, 일본 유학과 전위미술의 경험, 자유미술가협회 활동, 식민지와 해방, 분단과 전쟁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조형언어를 만들어간 ‘정진형 화가’였다는 것이다. 책은 그의 성장과 교육 과정부터 다시 추적한다. 평양의 문화적 환경, 오산학교와 류영모·함석헌, 임용련·백남순 부부의 미술교육, 일본 문화학원 시절,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 동시대 화가들과의 관계, 일본 전위예술과 초현실주의의 영향까지 살펴본다. 특히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일찍부터 소를 소재로 작품을 출품하고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주목받았던 기록을 통해, 이중섭이 해방 이후 갑자기 등장한 ‘야생의 천재’가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전문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이중섭 해석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 제기도 이어진다.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그림은 과연 모두 독립된 ‘미술 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하는가. 저자는 엽서화를 사적인 연서이자 자료의 성격에서 다시 바라보고, 10여 년 뒤 피란기에 제작한 은지화와 비교한다. 두 시기의 현격한 조형적 차이는 오히려 이중섭이 타고난 완성형 천재가 아니라 고통과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정진한 화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또한 황소, 아이들, 물고기, 복숭아, 닭과 까마귀, 가족과 부부애 등 반복되는 도상을 분석하고, 원형 구도와 일필휘지의 선, 은지화의 기법을 통해 ‘대향大鄕’이라는 화명이 상징하는 ‘큰 고향’, 즉 이중섭이 끝내 돌아가고자 했던 이상향의 구조를 읽어낸다.
후반부에서는 불교의 연기사상과 상호의존성, 노자의 사유까지 이중섭 작품과 연결하며 그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질문한다.
왜 우리는 이중섭을 ‘천재’라고 불러야 했는가.왜 한 화가의 비극적인 생애는 ‘신화’가 되어야 했는가. 1970년대 이후 이중섭의 비극적 생애와 요절, 순애보가 대중적 서사와 결합하면서 ‘천재 이중섭 신화’가 굳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신화를 해체한다고 해서 이중섭의 예술적 가치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신화를 걷어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은,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인간이다. 천재가 아니라 정진한 사람.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시대와 싸우며 그림을 그린 사람.이 책은 ‘국민화가 이중섭’을 다시 인간 이중섭에게 돌려주는 평전이다.